210829 주일
시편 63편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 63: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들어가는 말
오늘 시편도 다윗의 비탄 시다. 그런데 여느 비탄 시와 달리 주를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고백과 찬양으로 채워졌다. 오늘 본문은 61편에 62, 63편에 이르기까지 아들 압살롬을 피해 유다 요단강 동편 마하나임에 숨어지낼 때 지은 시로 추정된다. ‘유다 광야에서 지은 시’란 부연설명으로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로 오늘 말씀의 주제를 정하였다.
시의 내용은 1-4절, 피신하여서도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고, 5-8절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며 기쁨과 만족함으로 노래하고 있다. 9-11절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확신하며 흔들리지 않음을 노래한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광야’에서 ‘존재론적인 사유’를 경험한다.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물을 때는 굶주릴 때이다. 이에 오늘 본문에 앞서 <하나님의 경고> 즉 <광야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먼저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광야의 특성’은 외롭고 황폐하며, 거칠고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누구나 인생의 광야에 서면 당황한다. 건강하던 이가 갑자기 시한부 선언을 받는다. 잘되던 사업이 졸지에 망했다. 꿈을 이루기도 전에 모두 빼앗겼다. 이와 같은 광야를 바라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광야로 내몰아가신다. 성경의 사례를 보자.
1. 계시록의 경고
요한은 계시록을 통해 종말의 때를 경고하고 있다. 성경 중에 가장 어렵고 난해한 성경이다. 이를 억지로 풀려는 시도가 많다. 이를 베드로 사도는,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억지로 풀려다 망한다고 경고한다. 성경은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기다림에서다. 이를 무리하게 풀려다 이단에 빠지고, 지적허영에 붙들려 사이비종파가 된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놓아두는 것이 지혜다. 때가 되면 성령이 알게 하신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특히 계시록은 6장 이후부터 어려워진다. 그 내용이 어렵고 난해하다. 그 가운데 8장을 보면, 오늘 날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경고>가 숨겨져 있다. 말세의 때에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6절).” 여기서 나팔은 심판을 알리는 선포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7).” 단순하게 보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환경 파괴 가운데 땅의 오염을 알린다. 수목의 삼분의 일이 타버린다. 세계 곳곳에 연일 화재가 끊이지 않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8-9).” 이는 바다의 오염이다. 다들 알다시피 바다가 죽어가고 있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10-11).” 강과 하천에 오염되어 우리가 마시는 물이 파괴되고 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12).” 이는 하늘의 오염인데 심지어 저 우주, 천체의 오존층이 파괴되고, 우주 쓰레기 수천 톤이 공중을 배회하며 떠다니고 있다.
2. 우리의 본보기
바울은 이를 우리에게 본보기로 보여주시는 거라 하였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6-7).” 왜 본보기로 보이시는가? 악을 즐기지 말라는 것이다. 곧 구약의 역사, 출애굽의 과정은 오늘 우리에게 보이시는 거울과 같다. 오늘 날의 이러저런 징조는 예전에도 있었던 악함이다. 하나님의 경고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계속 된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빌라도가 난데없이 제사지내는 갈릴리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이를 보고 제자들은 저들이 무슨 죄로 저런 끔찍한 일을 겪는가? 하고 궁금해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2-3).” 우리에게 향한 경고다.
이어서 보면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4-5).” 어느 날 갑자기 예루살렘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압사 당했다. 저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커 그런 일을 당한 것인가? 아니다!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를 바 없다는 경고다. 얼마 전 어디 물류창고가 불에 탔다. 어느 도심 한복판에서는 건물을 붕괴하던 작업 중에 지나가던 버스가 깔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저들이 누구보다 죄가 커서 그런가? 우리는 좀 나은 게 있어 무탈한가? 이는 모두 경고다.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예외가 없다.
3. 무심한 외면과 안이한 거절
오늘 본문에 앞서 이와 같은 말씀을 먼저 다루는 까닭은 하나다. 우리는 저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들어 경고를 외면하고 거절한다.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주인의 잔치 초대에서,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다 일치하여, 즉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억울하지 않은 변명 없다.’ 저마다 초대에 응할 수 없는 사연도 그럴듯하다.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7-20).” 그럴 수 있지 않나?
공부에 전념하느라 서로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직장 생활하느라 당장은 예배에 나갈 수 없다. 돈 벌어 노후 준비를 하느라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할 시간이 없다. 그건 다 팔자 좋고 할 일 없는 직업적인 목사나 교회 종사자들이나 하는 일이다. 설마, 그리 여기는가? 오늘 시편 63편은 다윗이 미친 게 아니면 지금 그 와중에 이런 감사의 찬송이 가당키나 한가? 남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아들에게 쫓겨가 유다 광야에 숨어 지내면서 이 무슨 허세 같은, 말도 안 되는 찬송과 경배의 노래란 말인가? 오늘 우리는 하는 일이 잘되고, 배부를 때 콧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를 같이 배우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자는 찬송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물도 없고 황폐하고 주린 영혼으로 주를 강한다. 어렵고 힘들 때가 주의 신호다. 마음이 답답하고 몸이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주의 손길이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언제 우리가 그런 소중한 시간을 맞이하겠나? 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143:6).” 이것이 특권이다. 하나님을 알면 찬송한다.
둘째,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원하는 자의 노래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2).”
살아보면 알지만 사는 일이 내 맘 같지 않다. 되는 일이 내 뜻대로 안 된다. 자식 일도 내 의지로는 안 된다. 오직 주의 권능으로밖에는 영광을 얻기 어렵다. 그게 어려우니까 세상 영광으로 대체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다들 자기 배불리는 데 정신이 팔렸다. 교회를 다니든 안 다니든, 예수를 믿는 자이든 안 믿는 자이든, 축복의 기준이 세상에서의 영광이다. 좋은 직장, 남부럽지 않은 연봉, 적당한 건강과 분에 넘치는 삶의 안락을 하나님의 복으로 안다. 그런데 성경의 관심은 우리의 관심과 다르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아니면? 모든 것이 허사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셋째, 주의 인자하심을 아는 자만의 노래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주의 인자하심은 자신이 얼마나 구제불능인가 하는 것과 비례한다.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는 만큼 주의 긍휼하심이 더한다. 아니면 온통 수고하고 애씀이 고달프기만 하다. 자기 자랑에 겨워,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하는 따위의 기도,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2).” 그런데 주님은 스스로 자부하는 이의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우리 주님은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며,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 하고 선언하셨다.
넷째, 자신의 평생을 바치는 노래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4).”
우리가 환경을 보호하고, 생태계를 걱정하는 까닭은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안 믿는 가족들을 위해서다. 지구 종말은 온다. 예수 재림은 이루어진다. 그에 앞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다. 언제까지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실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 13:34).” 결국 더는 원하지 않을 때, 노아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처럼 홀연히 주의 날은 임한다. 우리는 누구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하면 가장 유익한 하루는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드는 것이다.
다섯째, 환경을 초월하는 영혼의 만족으로 부르는 노래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시 63:5-6).”
다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죽겠다, 죽겠다 한다. 그런데 이 정권 들어서 더 그런가? 그렇게 그리워하는 박정희 때는? 전두환 때는 좀 나았나? 착각하지 말자. 그때는 더 했다. 무참히 끌려가고 아무도 모르게 죽어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오늘이 힘든 건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침상에 누워 주를 기억하고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가?’ 아직 그 정도로 절박하지는 않나? 곧 인생의 밤이 올 것이다. 그때에 우리 영혼의 만족은 어디에 있을까?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119:55).”
여섯째,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자의 노래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 63:7-8).”
살면서 주의 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영혼은 불쌍하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시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든든히 서지 못하면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하고 죽어라 하며 헛발질해대며 사는 수밖에!
일곱째,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의 노래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시 63:9-11).”
지구상에 끝까지 살아남을 존재는, 악한 무리다. 정의를 구현하는 미국? 신앙의 정통을 자랑하는 영국? 과연 그런 국가가 가장 오래 역사 가운데 살아남을까? 아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며 주를 찬송한다.
나오는 말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사실 앞에 안도한다. 내가 뭘 해서, 그걸로 평가 받는 게 아니라는 데서 안심한다.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이의 인자하심을 앎으로 감사한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는 힘이 생긴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저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죽어라 하고 세상 영광을 위해서 기를 쓴다. 아,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10).” 저들이 안다고 여기는 그것으로 저들은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시 143:6).” 하는, 이것이 우리의 특권이고 나의 목숨보다 귀한 주의 인자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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