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이사야 16장 / 다윗의 장막

전봉석 2024. 9. 13. 09:33

240915 주일

 

이사야 16장

다윗의 장막

 

사 16:4 나의 쫓겨난 자들이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들에게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사 16:5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들어가는 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이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은, 모압이 모압의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다윗이 단순히 저들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여, 오늘 우리도 “성령의 감동으로” 교회로 나왔고(눅 2:27), “성령의 감동으로” 가라, 가지마라 이르신다(행 21:4). 이는 오늘 우리 안에 ‘모압의 속성’이 있으나 동시에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과 같은 부르심’과 ‘다윗과 같이 주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야 하는 주의 인도하심이 있다.

 

당시 모압 사람들은 ‘헛된 우상숭배’와 ‘교만함’으로 살다 멸망할 것으로 예언의 말씀을 받는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교만이다. 하여 지혜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하고 교훈하였다. 이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18:12).” 이와 같은 명료한 진리를 ‘모압의 멸망’에 따른 예언에서 확신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살 때 겸손함으로 그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자요 모든 일의 주관자가 되신다. 우리 하나님의 섭리를 경외할 때, 부족하나마 경건한 생활의 유지하고자 한다. 마치 건강에 필요성을 절감한 이들이 부쩍 더 섭생과 운동으로 다시는 건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으로 성경을 알고 이를 근거로 바른 생각과 생활을 유지하려 한다.

 

곧 오늘 ‘모압’에 대한 경고는 정작 멸망할 모압을 위한 게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윗의 장막>을 향한 말씀이다. 마치 지옥이 존재하는 이유는 정작 지옥에 갈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지옥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들로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을 위한 것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하시는 말씀 앞에 겸손해진다.

 

본문이해

 

오늘 본문은 15장에 이어 ‘모압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내용’으로 이어간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모압 족속들에게 다윗의 왕권에 복종하도록 지시함으로 ‘이방인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15장은 애가 형식으로 전개한 반면, 본장은 ‘심판의 동기’와 아직 다 예언하지 않은 ‘심판의 결과’가 기술되고 있다.

 

결국 모압의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 유다와의 관계 속에서, 좀 더 포괄적으로는 메시아의 구속과 연관이 있음을 ‘다윗의 장막’으로 알게 하신다. 오늘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도 전반부는 ‘모압의 심판이 유다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중반부에서는 ‘모압에게 임할 심판의 동기와 심판의 결과’가 서술되고, 후반부에서는 ‘모압의 심판 시기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명시되고 있다.

 

1. 모압의 순종을 촉구하시다(1-5)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사 16:5).”

 

멸망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모압에게 다윗 왕권이 이어져 메시아에까지 닿을 것을 알리며 순종할 것을 권한다. 모압 백성들을 유다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아래 두시길 원하시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 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도망한 자들을 발각되게 하지 말며 나의 쫓겨난 자들이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들에게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1-4).” 그리하여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이 왕위가 설 것이라 하신다.

 

곧 이는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과 공평과 의로우심으로 구속을 얻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사야는 시온(예루살렘)이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10:24).” 고로 모압에도 시온으로 와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날개 아래 들기를 권하시는 것이다.

 

시온은 온 세계, 모든 민족의 유일한 희망을 의미한다.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2:2-3).”

 

이에 모압은 유다에 조언을 구하고 자신들의 피난처가 되어 보호해 줄 것을 간청해야 한다(3-4). 모압의 사신들이 유다에 말한 내용으로 오늘 본문의 서두를 시작된다. 모압이 다윗 왕권에 복종하면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에 동참할 수 있다. 곧 이방 나라에 전해지는 예언이다. 역설적으로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암 9:10).” 그런데 과연 저들이 순순히 이와 같은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

 

2. 모압에 임할 자연적 재난을 알리신다(6-10)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네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9).”

 

불순종의 결과는 뚜렷하다. 심판의 동기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로다(렘 48:42).” 하신 말씀에서도 교만이 어떠한가를 말해준다. 교만이란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한 것’이다. 교만은 모든 심판의 동기이다.

 

앞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에 대하여,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5).” 하고 전제한 후,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10).”

 

또한 바벨론에 대하여도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14:12-13).” 하고 앗수르에 대하여 덧붙여 “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25).”

 

이와 같이 오늘 모압에 대하여도 교만, 거만, 분노, 자랑 등으로,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16:6).” 하고 그 근거를 심각하게 들고 있다. 이에 하나님은 우선 자연 재해로 극심한 가뭄을 통해 징계하신다. 모압의 포도 농사를 망쳤다(7-10). 이를 분명히 주께서 행하신 것임을 밝히신다. 10절 하반부에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명심할 것은 심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란 사실, 그 원인은 교만이 중심이란 점이다.

 

3. 모압의 심판 시기를 말씀하신다(11-14)

 

“이는 여호와께서 오래 전부터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거니와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것없이 되리라 하시도다(13-14).”

 

오늘 우리는 모압의 심판의 원인과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다루고 있다. 심지어 모압에 선고된 파멸이 성취될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계신 것을 본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였다면 당연히 모압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최소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요나의 심판에 대한 선포 이후 잠시나마 회개하고 돌이켰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야 옳지 않을까? 그것도 저들이 본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예들로 앗수르나 바벨론과 같은 이방국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저들이 자신들의 신을 의지하고, 여호와의 심판을 피해 보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산당’에 올라가 기도하며 피곤할 때까지 봉사했다.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12).” 그러니 참… 우리의 교만과 나름의 살고자 하는 모색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의지와 섬김은 우상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이와 같은 분명한 말씀을 우린 명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사회가 ‘사람 중심의 사회’로 변해가면서 모든 신의 기준과 그 대상 또한 사람을 이롭게 하는 쪽으로 끌어 모으고 있다.

 

나오는 말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 5:7).”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섬길 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기준은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때마다 바뀌는 기준이라면 그게 기준일 수 없듯이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32:39).” 이는 우리가 인정하고 안 하고의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다. 흔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말 우리의 교만을 그대로 반영하는 표현이라 하겠다. 당장은 가릴 수 있다. 모든 권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지하거나 막을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하시는 말씀 앞에 최소한 자신의 판단과 기준이 옳은 듯 교만을 일삼으면 안 된다. 지혜자의 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는 경고를 듣고 부디 겸손하기를.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6:18, 18:12).” 우리는 이사야서 15-16장에서 모압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오늘 내 속의 ‘모압’으로 살피려는 의도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부디 주의 말씀이 우리 심령을 강하게 붙드시길.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사 16: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