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행하셨도다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에스겔 29:6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시편 135:6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때, 자신의 힘을 의지할 때, 그 결과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주목하게 하신다. 애굽은 그와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여러 증거를 마주했음에도,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없었던 애굽의 교만을 상기시키신다. “그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행한 표적들과 징조들을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보내셨도다(시 135:8-9).” 저들은 힘의 상징과 같아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겔 29:6).” 저들을 흩으시고 망하게 하시고 다시 복원하여 더는 힘을 다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이와 같은 모든 주권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신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앞에서만 살 수 있음을. 긍휼이란 히브리어로 ‘라카밈’ 곧 ‘야훼의 자궁’이란 뜻을 갖는다. 하나님이 그의 속에 나를 두시고 자라게 하심 같이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를 헬라어로는 ‘스플링크나’ 곧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이란 뜻이다. 헨리 나우웬의 <긍휼>이란 책에서 읽었다. 성경은 기록하셨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그렇지. 내가 저를 생각함은 내 마음으로가 아니요, 예수의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9-11).” 아멘.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세상을 마주하게 하시려고, 그러니 때론 역겹고 감정이 상하고 우선 기분이 별로인 저를 두고 주 앞에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왜 자꾸 생각이 나는지. 그러든가말든가 마음을 쓰지 않으면 그만일 텐데, 명치끝에 자꾸 뭐가 걸린 듯 아픈 게, ‘너 때문에 아프다.’ 아픈 나를 나도 이해하기 힘든 통증이다. 그것으로 기도한다. 주의 긍휼을 내 삶에 재현하는 것이다. 나는 저의 자궁 속에 있듯이 안전함으로.
추위가 매서웠으나 교회 안은 평온하였다. 아내는 장모를 거들기 위해 동대문에 갔고 딸애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혼자 있는 게 싫지 않으면서 혼자 두는 게 싫었다. 점심께 사장이 그의 부친과 나와 비워진 사무실로 짐정리를 하였다. 커피와 귤을 내어주고 나는 글방에 있었다. 햇살이 따뜻하였다. 헨리 나우웬의 <긍휼>을 새삼 꺼내 읽으면서 ‘아, 좋다.’ 하는 평온에 젖어들었다. 아무리 어떠어떠해도 나를 그의 속에 보호하심 같이 안온하였다. 결코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시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는 이제 나의 지난날을 마주할 수 있다. 숨기고 외면하며 한사코 부정하던 죄악 된 모습을 주 앞에 내어놓고, 그러했던 가운데도 긍휼하심으로 나를 돌보셨던 주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묵상하였다. 그러했던 나를 그럼에도 사랑하셨던 그 사랑으로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이를 마주한다. 그러면 내 안의 증오와 미움은 슬그머니 들었던 돌을 도로 내려놓고 뒤로 물러가는 군중처럼 잔잔해진다. 내가 누굴 원망하고 누굴 예단하며 속단하여서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주의 긍휼은 나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상기시킴으로 내가 누구를 또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제시하신다. 그렇게 읽혔고 이해했고 알겠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아! 나에게 책 읽기란 항상 하나님의 목소리를 경청하게 하시는 것이다. 다들 나만 두고 어딜 가는 게 못마땅했다. 동대문 집에 연연하며 늙은이가 매달리는 것도 마땅찮은데 그러한 노모를 또 혼자 둘 수 없어 아내까지 나서야 하는 토요일 오후가 화가 났다.
직접적으로 그 집 상속인인 형님과 그 가족들은 뭘 하고! 나는 괘씸하여 골을 내다가 그건 내가 뭐라 할 소리가 아니고, 아내가 고생스러운 게 안쓰러운 듯 위장하지만 실은 나를 혼자 내팽개쳐두는 것 같아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아내와 그런 아내를 두고 화를 품는 내가 시끄러웠다. 이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을 때, 인자하신 나의 하나님은 몇 해 전에 읽었던 헨리 나우웬의 <긍휼>을 꺼내들게 하셨다.
나의 허물과 죄악을 무한한 온유로 안아주시는 주님. 그렇겠구나. 거듭난다는 것은 곧 주의 긍휼하심이라는 자궁 안에서 새롭게 출생하는 신비다. 얼마나 나를 귀히 여기시고 살뜰히 보호하시는지. 나른하게 양지바른 창가에 비스듬히 앉아 <긍휼>을 읽으면서, 내 안에 이는 불평과 불만을 회피하지 않게 되었다. 화가 난 것이다. 골난 아이처럼 삐져서 말을 꾹 다물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다 주의 인자하심이라니! 속이 좁기는 세계에서 으뜸일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는 길은 주의 긍휼하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시 95:7).” 고로 내 안에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내가 주의 자궁 가운데 거하듯 평온한 것은 주께서 내 속에 거하심으로 누리는 평온함이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이대로 참 좋은 한 날이었다. 바깥은 칼바람이 불고 누구는 어떻고 세상은 어떠해도, 나로 하여금 주의 안에 거하게 하시려고. 주의 긍휼하심은 날마다 그 때가 어떠하든, 역할이 어떠하든, 환경이 어떠하든, 별개의 세상으로 나를 보호하신다. 아이엄마가 아기를 임신하고 뒤뚱거리면서도 아이를 보호하고 우선하는 모든 원리처럼.
값없이 받은 자는 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래서였다.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받았으니 나 또한 자비할 수 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말씀이 말씀으로 이끄시듯 기억나게 하시고, 그 의미가 나의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오늘의 모든 환경을 조성하시는 거였다. 오후 늦게 혼자 집에 올라와 라면을 끓여 이른 저녁으로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 뒤 혼자 놀다 잠든 아이처럼 누웠을 때 주의 인자하심이라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세상이 멸망하여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기어이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면 족하다.
바울이 기술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찬가’를 음미하자(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을 나우웬은 이렇게 읽었다. ‘무력해진 한 사람으로 우리가 강해지고, 약해진 한 사람으로 자유함을 얻었고, 자신의 특징을 버린 한 사람으로 우리가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며, 종이 된 한 사람으로 우리가 지도자를 만난다.’ 칼 바르트는 이렇게 읽었다. ‘높은 곳에서 맨 바닥으로, 정복에서 패배로, 부요함에서 가난함으로, 승리에서 고난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읽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나는 이렇게 읽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고 낮추고 천해지심으로 나의 눈높이로 오셨다. 근본은 하나님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이 되시고 더 낮고 천한 사람의 모양으로, 내 앞에 나타나신다. 때론 꼴 보기 싫은 아이로, 어쩔 땐 한없이 까부라지는 자기연민으로, 또는 민망하고 송구하여 부끄럽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나로 알게 하시려고.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시 135:1).” 나로 하여금 말씀 앞에 서게 하신다.
일찍 나를 흔들어 깨우시고,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나의 삶으로 살게 하시려고 오늘도 함께 하신다. 그것으로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생각한다. 주 앞에 나와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가 함께 하실 것을 의뢰한다. 지금은 희미하나 반드시 뚜렷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만이 온전한 것을. 애굽을 의지하였던 게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저희는 그저 갈대 지팡이였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