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전봉석 2017. 11. 20. 05:24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에스겔 30:2-3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1

 

 

 

참 이상하지? 아이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오게 됐다는 문자가, 새삼 그나마도 왜 다행으로 여겨지며 안도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녀석이 주일을 기억하고 사는구나. 와야 한다는 마음은 있는 것이구나. 그런데 그게 자꾸 안 되고, 어려운 것이니까…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만을 바라고 구하면 되는 일이구나. 싶은! 그러게. 아직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모스부호처럼 다행한 일이었다. 감사하였다. 여러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내 안에 있는 그 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정말이지 내가 언제 순수하게 누굴 사랑했던 적이 있었던가? 질투도 시기도 어떤 의심도 불안도 심지어는 적개심도 판단도 눈곱만치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늘 앞서는 나의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다. 노심초사 그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채근하지도 나무라지도 그렇다고 누구를 시켜 설득도 종용도 없이 무던히 참고 또 기다리셨다가, ‘아직 상거가 먼 데’ 단걸음에 먼저 나아가 무조건 맞아주시는 그 마음으로의 마음 말이다.

 

한 아이는 늦잠을 자느라, 한 아이는 누가 안 올 것 같다고 해서, 졸지에 두 아이가 못 오는 바람에 같이 준비하려던 주먹밥이 남게 생겼다. 한데 마침 그때 사장이 옆 사무실을 정돈하느라 아버지와 같이 나왔고, 별 거 아니지만 컵라면에 주먹밥을 같이 나눌 수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게 다 적당하였다. 슬픔도 슬픈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통도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더 큰 의미가 내포돼 있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위해 기도해야겠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내가 저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게 예수의 심장이어야 하고, 이는 내가 받은 긍휼하심이었던 것이다. 무조건 나를 맞아주신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곧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예수님 안에서 순종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말이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그러니 나는 어느 쪽인가.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래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그의 전부를 사랑한다는 일이다. 단순히 내 취향에 맞는, 서로 통하는 느낌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저의 아집과 고집이 있고, 켜켜이 묵은 감정이 도사리고 있으며, 숱한 사람들로부터의 상처가 있고, 배신이 있고, 원망도 분노도 있다. 자기합리가 있고, 자기주장이 있고, 자기애가 있다. 친절만이 아니라 교활한 이기심도 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나 가능할 일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저 아이를 품을까? 어린아이라고 순수한가? 교활함이란 감출 수 없는 얼굴 같지는 않지만 돌아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뒤통수 같은 것이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 남겨놓는 마음이다. 흘리고 간 것인지, 버리고 간 것인지, 그 뒤를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어서 끝장을 내던지, 그저 모르는 척 하든지. 그래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비로소 내가 죽어나는 일이다. 단순히 좋은 걸 사랑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야 좋았다 나빴다, 사랑도 홀딱 홀딱 뒤집히다보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살아내는 것일 뿐이지만.

 

누구를 전심으로 사랑한다는 일은 그 한 사람의 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모든 걸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묻지 않았다. 다그쳐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셨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4).” 그러므로 족한 것이다. 사랑은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다. 내가 여태껏 누구를 정말 사랑해본 적이 있었을까? 예수의 심장이 아니고는 어림없는 일이지 않겠나? 고작 오늘 이러저러해서 못 가요. 다음 주에 뵐게요. 하는 아이의 문자에도 눈물겹도록 고맙고 감사했던 마음이 혹시 그런 것이었을까?

 

아직 그래도 아이가 주일을 기억하고 있구나. 아, 주님!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아버지의 마음을 내게 주소서. 내가 저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하물며 내 안에 이는 시기와 불만과 서운함과 아쉬움을 안고 누굴 어찌 사랑하며 살았던 것일까? 한 번도 순수했던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 당연하여서,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에 반응하는 것. 사랑이란 그런 것이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주도하는 것. 순종 가운데 고난당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이 참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내 안에서 순종을 받으시며 나타날 영광을 위해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시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이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그렇지.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그의 전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어느 것도 소홀히 여기시는 법이 없으신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머금는다.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겔 30:2-3).”

 

그날에 구름의 날일, 여러 나라들의 때일, 여호와의 날에 우리가 함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하는 송축을 올려드릴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나는 저 아이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다 똑같아서 저마다 어쩔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뒤뚱거리며 사랑을 하지만, 그것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를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내 안의 서러움이 먼저 내 목을 조인다. 오해는 너무도 간단한 것이어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 그것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손을 내미신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1-32).” 내가 한 사람을, 그의 전부를 사랑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이다. 아버지 밖에 있기는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나 집 안에 있는 큰 아들이나 다를 게 없었다. 아버지의 전부를 가지고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이다. 거저였다. 나도 값을 내고 받은 게 아니다. 그러면서 무얼 요구할 것인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내가 죽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한 사람의 전부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9-10).” 그리하여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4).”

 

곧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그렇구나. 나 같은 자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나를 비천한 가운데서 기억해주신 이에게 대한 감사였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3).” 짜증나고 때론 아니꼽고 비참한 생각이 들다가도 내가 그러했을, 내가 아버지의 마음에 그와 같이 억장이 무너지는 사랑이었을 것을 생각하면 면목이 없다.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것들로부터 풀려나게 하신 아버지의 오랜 기다림에 대하여.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일은 주의 기쁨을 기어이 감당하는 일이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4).” 이미 기쁨이었을 그 전부를 꼬옥, 껴안는 일이다. 용서는 이루어졌다. 내 일이 아니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 어떤 대가를 바라는 희생은 더 이상 희생이 아닌 거였다. 그리하여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내가 죽어야 하는 일이나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인자야 너는 통곡하라. 예언하라. 이르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아버지께 돌아오는 날, 우리가 붙들고 의지하던 ‘갈대 지팡이’를 버려버리는 날. 축제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참고 또 참고, 기다리고 또 오래 기다리신 아버지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라.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