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
에스겔 31:10-1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스스로 높아지면 낮추신다. 교만하면 쫓아내신다. 주님의 겸손함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래서 오늘 말씀은 더욱 선명하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겔 31:10-11).”
우리들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징계도 하신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나의 교만이 얼마나 수시로 또 거침없이 자라나곤 하는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8).” 이에 우리는 시온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려고, 이는 뚜렷한 증거여서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신다. 저녁에 TV 보는 시간만 줄여도 충분히 일찍 잘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밤마다 쓸데없는 데 즐거움을 두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일찍 잠들면서 나의 한 날은 길어졌고 새벽은 온당하여졌다. 그랬다.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거리두기. 남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로 우리의 목적을 두지 않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나름의 가치에 대해 그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주를 더욱 바랄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리 기도하셨고 또 바라시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세상에 남았으나 세상적이지 않음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8-19).” 결국 나의 선택이 아니라 주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으로써 세상에서의 구별된 삶이겠구나.
어떤 특별한 삶이 아니라 일상의 그 순간들이 주를 향하게 하시려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주님의 삶이 표본이다. 나의 위도와 경도를 측량하는 기준점이다. 그러하신 주님의 삶을 따라 나에게 더하시는 삶 가운데서 온전히 주를 바라는 것. 의지하는 것. 따르는 것. 그러자면 세상으로의 관심을 접어내야 하는 것.
보니까 얼마나 많이 또 흔하게 물들어 있는가 알 수 있다. 옷차림에서부터 모든 관심의 정도가 유행을 따른다. 저들처럼 할 때 행복하고 나아지는 삶 같다. 떨어져 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행여 나 혼자 엉뚱한 길로 갈까봐, 그러느니 수많은 사람들이 향하는 쪽으로 눈길을 두고 사는 게 가장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그랬구나. 그러고 있으면서 또한 주를 나의 주로 삼고 살려니까 그 위치가 자꾸 흔들리는 것이다. 위도를 맞추려고 하면 경도가 흩어지고 경도를 바꾸려고 하면 위도가 벗어나고.
왜 그럴까? 내가 짊어지고 살려니까 그렇다. 안 그러면 불안하니까, 그러느니 내가 주도해야 하는 삶을 옳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손짓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자고 부르시는 데 이를 오해하여 더 큰 짐을 지우는 것 같아 꺼려지는 것은 내 것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였다.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주님만으로 산다는 게 마치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아서 그럼 노후대책은 어쩔 것이며 당장 먹고 사는 문제는 또 어찌 해결할 것인가. 나의 이상과 꿈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지 않나. 답답해하는 우리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더 큰 일을 맡기신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우선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큰 일, 나의 이상과 목표를 향한 애씀보다 더 가치 있는 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 공동체로 살아가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1-4).” 서로를 돌아보며 위로나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로 돌보는 게 주의 기쁨이시다.
종일 햇살이 들지 않아 추운 하루였다. 바람이 매서웠고 간간히 눈발이 날렸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옆에 사무실은 비어 있어 고요하였다. 때론 외로움이 주를 더욱 깊이 바라게 한다. 할 게 없으니까 말씀을 읽는다. 저를 바라고 구한 이들의 책을 읽으며 온전히 주를 의지하게 하신다. 세상으로부터 관심을 거둘 때 오롯이 주님을 보게 된다. 언제부터는 친구도 유행도 갖고 싶은 것도 없다. 없어도 되는 게 되었다. 딸애가 용돈을 주면 도로 아내에게 주는 이유다. 굳이 살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중요한 건 주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솔직히 난 자주 책을 읽으면서 좌절한다. 어떻게 해야 저들처럼 온전히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여전하여서 세상적인 근심에 더 자주 사로잡히고 그 오락과 재미에 더 흥미를 두곤 하는데. 이런 나의 일상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겠으니 나는 그저 면구스럽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하나님께로 고정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이미 벌써 나의 시선을 돌리고 있었구나, 생각한다. 예전에 같이 어울리던 것들이 얼마나 주를 외면하게 하였던가.
오늘 에스겔서의 그 결과는 큰 교훈이 된다.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겔 31:18).” 주신 바 좋은 것으로 오히려 교만하였을 때, 그 끝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되새긴다. 나도 그럴 거였는데, 충분히 내 곁의 잘난 사람들과 함께 주를 모른다, 하고 살 거였는데.
강권하여 돌려세우신 주의 긍휼하심 앞에 감사하다. 그리고 내게 이르시기를 나와 같은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명이었는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내가 이럴 줄 알았나. 그저 잘난 맛에 사는 위인이라 겁 없이 굴곤 하였는데, 그것이 도리어 부끄러움이 되게 하셨다. 돌아보아 민망하고 송구한 일이 되게 하셨다.
일찍 일어나 앉히시고 말씀 앞에서 주를 바라게 하심이 기적이라. 딸애가 출근하고 뒤미처 천천히 글방에 올라가면 요즘은 여덟 시를 조금 밑돌거나 하는데, 그 시간에도 복도에 노인들이 즐비하게 앉아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여덟 시 반부터 입장인데 그리 일찍들 와서 순번 경쟁을 하는 것이다. 그 옆을 지나 교회로 들어설 때면 나는 저들 노모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 육신의 고통이 저들로 하여금 그 치료(?)를 절실하게 하는 것이겠으나,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면. 곧 들어갈 저 천국을 사모함으로 노년을 마무리 하였으면.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요 7:29).” 곧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6:46).” 나로 하여금 주를 알게 하시려고, 나의 모든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시었다. 온전히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와 같은 확신을 내게 더하신 이에게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1).” 주를 믿으라. 곧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 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
이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