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이르라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도다 너는 내려가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와 함께 누울지어다
에스겔 32:19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시편 138:7
곧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2:3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의 결국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 아름다움이 도리어 눈을 돌려 주를 바라지 못하게 하였구나. “이르라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도다 너는 내려가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와 함께 누울지어다(19).”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그 허망함을 일깨우신다. 늘 같은 말씀이 반복인 것 같지만 사람 참 안 변한다. 늘 보면 또 항상 그 모양이다. 해이한 사람은 여전히 안이하였고, 힘에 겨워 쩔쩔매는 사람은 여전하여서 되레 안쓰러웠다. 뭐라 한들, 결국은 정말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인지. 이런 말이 쉽지 않지만 그러고 보면 환난이 보약이라.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시 138:7).”
것도 그럴 수 있는 은혜에서였다. 누군 더욱 완고해지고 무심해져서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산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내가 말씀 앞에 바로 서는 일. 보잘것없고 누추하기 이를 데 없으나 우리 교회가 주변에 이웃하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기를, 우리는 날마다 모여 기도한다. 말씀과 기도밖에 달리 더 좋은 수를 나는 알기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도 궁리하고 저렇게도 생각을 모아보지만 주신 대로 살자. 두신 곳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자.
뜬금없으나 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앞에 두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읽고 ‘독후감 쓰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곧 주일에 나올 것 같은데 그게 적당하지 않은지. 뭐라 뭐라 하는 아이에게 사람보다 신기하고 또 놀라운 게 어디 있겠나? 되물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8:5).” 그러나 사람 하나하나가 어찌 아니 복잡하겠는가만. 뇌만 해도 은하계의 별보다 더 많은 수의 세포들로 이루어져 서로 연결되고 이어져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이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관장하면서, 그런데 기억은 또 어떠한지.
뇌의 조직망을 초월하여 마음은 기억을 움직이는 조직과 연결되었으나 구별되다. 능구렁이 같은 저 어린아이의 속내도 가늠할 수 없는 일인데, 이를 내가 무엇으로 판단하고 구분할 수 있을까? 기도밖에는. 말씀밖에는. 그리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수밖에는. 그러므로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138:7).” 이보다 더 명쾌한 답이 또 있을까? 저마다의 논리와 가치 기준을 갖고 산다지만 말씀 앞에 앉는 게 상책이었다.
일대일로 아이와 둘만 수업할 땐 좋다. 녀석의 미세한 동작에도 의미를 두고 주께 묻곤 한다. 뭘 어떻기에 담임은 저 아이엄마를 불러 주의산만을 물어 치료를 요한다고까지 경고한 것일까? 틱 장애인가 싶어 아이의 동작을 살피면 그저 장난이다. 부산하고 조금은 맥락이 없는 게 유독 눈에 띄곤 하지만 그것까지야. 대놓고 물어대는 일을 삼가면서 나는 글쓰기를 유도한다. 더 먼 기억을 더듬게 하여 기억의 방 어느 지점에서 문고리가 고장 난 것인지를 살핀다. 다 그렇지 뭐, 하고 나면 대수롭지도 않을 일이지만.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아이가 신앙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인내한다. 주일에 교회로 인도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다. 늦잠을 잔다거나 실컷 게임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렇다고 우리 교회가 어떤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되레 주일을 기억하고 교회로 올라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곧 올 거 같다. 나는 아이 앞에서 태연하게 굴면서 그 속은 복잡하였다.
어제는 누가 누가 생각이 나서 뜬금없이 여러 명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 싶었고 그 결과는 영락없었다. 한 사람과 같이 간다는 일은 말 그대로 서로의 전부를 받아들여야만 될 일이다. 어떤 이에게는 안타까움이, 어떤 이에게는 답답함이, 어떤 이에게는 배시시 미소가 번지면서 나는 각각의 의미를 되새겼다. 다들 그저 처한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누군 내게 늘어놓았던 자신의 고백이 힘에 겨운지 더는 말을 섞지 않으려는 듯 돌려서 싱거운 말만 했다.
아이는 글을 쓰고 나는 데이비드 시맨즈의 <기억의 치유>를 읽었다. 시선을 글자에 두고 있었지만 앞에 앉은 아이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흔들고 또는 머리를 제치면서, 혼자 궁싯거리다가 또 집중하여 글을 쓰고… 나는 모르는 척, 못 보는 척 하며 아이를 살폈다. 이번 주일엔 올 거지? 나의 기습적인 질문에 아이는 뜨악했다. 풉, 내가 먼저 웃고 말았다. 올 사람은 온다. 나는 이제 그 정도는 안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설득해서 왜 주 앞에 나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나는 때로 실망하고 또 낙심하기 일쑤지만 그게 또 내 일이라. 나는 그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주가 하신다. 이 변치 않는 진리를 이제 나는 안다. 우리 애들 아빠가 목사님하고 얘기하는 걸 좋아하니까, 교회에도 좀 나왔으면 좋겠어요. 늘 그 마음이어서 아이엄마는 시골에서 가져왔다며 들기름 한 병을 내게 주며 웃었다. 나올 사람은 기어이 돌아옵니다.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뭘 따로 기획해서도 아니다. 나는 속 끓이는 게 일이다. 그래서 말씀이다. 말씀과 기도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곁에 이웃하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 교회가 주님의 교회인 것을 알게 하소서. 애써 친절하지 않아도 또는 위선적으로 무얼 추구하지 않아도 와야 오는 거고 올 사람이면 온다. 중3 아이가 목요일부터 혼자 오기로 한 것도 어떤 조건이 따로 필요한 게 아니었다. 글방은 다만 교회라. 내가 주께 순종함으로 저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일이어서 나는 그것만 붙든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2:3).” 다만 그리할 뿐이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을 느끼는 것이다.’ 난들 아나? 내 안에 이는 마음에 대하여도 그 모든 감정세포가 무엇에서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굳이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아이에게 놀라워하며 말했다. 최소 130억 개의 세포로 우리 뇌가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의 세포에는 또 5천개씩의 서로 다른 신경조직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구나. 어떤 세포에는 한꺼번에 5만개의 세포가 연결이 돼 있고 말이지. 나는 책을 읽다말고 과장되게 놀라워했다.
어련할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 받은 사람이지 않나. 마치 그런 나를 내가 다 잘 안다고 여기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지 않겠나. 하물며 남에 대해서야! 그러니 내가 저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 아니고는 어림도 없다. 성령으로 우리가 통하고 말씀으로 연결되어 기도로 소통하면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주가 아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한참 복잡하다가도 주 앞에서 안도한다. 나는 그저 말씀뿐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찾아보고, 응용하고, 대입시켜보고, 이렇듯 글로 옮겨놓다 보면, 결론은 자명하였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주가 기도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 주를 믿는 자로서 그 눈으로 아이를 보면 알겠다. 당장 눈에 띄는 저 애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한 사람의 주님을.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신 바 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참 사랑을.
그래도 아이가 혼자 와서 뻘쭘하니 재미없어할 줄 알았는데 은근히 화요일을 기다린다나. 내겐 그 일만으로도 신기할 따름이다. 사람들이 아픈 게 기억이 병들어서이다. 또 그럴까봐. 혹은 그럴 게 빤하다는 기억 때문에. 그런 의구심을 갖고 있다가 시맨즈의 <기억의 치유>를 알게 됐다. 것도 신기한 노릇이다. 저의 책 몇 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주문을 할 수 있던 계기다. 다들 듣다보면 ‘예전에’ 교회를 다녔다거나 ‘어릴 때’ 믿었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공통분모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묵묵하니 주시는 길을 가자. 시므온과 같이 평생을 기다리다 다 늙어 죽기 직전에 메시야를 보게 된다 해도. 기어이 내가 살아서는 마주할 수 없는 세포 저 끝 도달할 수 없는 조직의 일부였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그럼에도 족한 것이다. 이로써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말씀 붙들고 살 수 있었겠으니 말이다. 새삼 교만하여지지 않기를. 아름다움으로 눈멀지 않게 하시기를. 결국은 주의 주권 앞에 나는 족하오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시 138:1).” 수천만 가지의 신들 앞에서,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2).” 내 안에 숱하게 이는 온갖 잡신은 물론이고 당장 더 귀히 여기는 그럴듯한 명분과 아집의 신들에 이르기까지. 내가 저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