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전봉석 2017. 11. 24. 07:33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에스겔 34:11-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시편 140:12

 

 

 

중3 아이가 새로 왔다. 덩치가 큰 사내아이였다. 온순하고 차분했다. 공부를 못해, 인문계를 갈 바엔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게 낫다며 그리 마음을 굳힌 아이였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그럼 난 무얼 가르쳐야 할까? 시큰둥하니 아이엄마는 글방엔 뭐 하러 가나 싶은 듯하였다. 지지난 주 전부터 아내의 부탁이 있었다. 사는 집도 저쪽 인하대 쪽이라 전철을 타고 오가는 아이였다. ‘일단은 가보고’ 하는 심정으로 온 것이다. 메모를 하고 주께 아뢰며 며칠째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겔 34:7-8).”

 

오늘 말씀 앞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듯하다. 나는 아이에게 말하길,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서 바닥을 깔아줄 바에 ‘그런 데’ 가서 스스로 내신을 쌓고 재능을 살리는 게 낫다는 말의 오류를 설명해주었다. 정직하게 묻자. 여기서도 안 하는데 저기는 하겠나? 아이는 주춤하였다. 나는 말을 덧붙여, 공부를 안 하는 아이들이 주로 모이는 데면 네가 더 불리하다. 왜냐하면 착하기 때문이다. 착하고 공부 못하는 애는 공부 못하고 못된 애에게 뒤떨어진다. 분위기부터 다르다. 아이들의 영악함이 어른을 뺨친다.

 

‘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는 거, 들짐승의 밥이 되는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부모님은 뭐라 하시니? 아이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알아서 하라, 그러면서 포기했고 엄마는 그래도 인문계를 갔으면 하신다고 아이는 전했다. 그럼 너는? 하고 묻자 담임선생의 권유를 그대로 옮기듯 왜 ‘그런 데’를 가야 하는지 다시 설명하였다. 아니, 너의 뜻은? 하고 다시 묻자 아이는 쭈뼛거리면서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한 시간 반, 정해진 시간 동안 공부를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무엇에 홀려 정신을 팔고 있는지, 부모는 어째서 이 아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그 동생 또한 심각하다는 말에 생각이 깊어졌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겔 34:11-12).”

 

보내신 이유와 목적은 뚜렷하였다. ‘일단은 가보고’ 했던 아이에게 나는 일 년 뒤를 이야기하고 앞으로 같이 했으면 하는 것에 대해 말하였다. 안 올 아이는 아니라는 데 확신을 주셨다.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릴 때 아내는 신기한 듯 꼬치꼬치 물었다. 그럴 애가 아닌데, 어머 기특해라, 그러게 애는 착하다니까, 하는 추임새를 넣으며 말을 받았다. 저녁 기도에 아이를 언급하며 주께 구하였다. ‘일단은’ 보내신 게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뜻하신 바 그 계획하심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였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 140:12).” 은연중에 아이는 내가 목사고 여기가 교회고 자신이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지 언급하며 알려주었다. 아직 섣부른 생각이겠으나 아이 안에 ‘어떤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하는 게 그럼 그렇지!’ 하는 식의 억눌린 자아가 아이를 착하게 만들었고, 공부를 못하게 몰아간 게 틀림없었다. 자존감은 한 번 다치면 회복이 어렵다. 누가 칭찬하면 그저 싱거운 소리로 자신을 띄어주는 걸로 듣는다.

 

한 아이는 초등학교 때 자기 이름 철자법을 틀려 선생님께 공개적으로 혼이 났던 경험을 평생 안고 산다. 누군 첫 사역지에서 나름 신뢰하고 의지하는 담임목사에게 얼토당토않은 일로 꾸지람을 들은 게, 사역을 새로 맡을 때마다 번번이 발목을 잡는다. 수치심이란 가장 여린 부분을 가차 없이 걷어 채인 경우다. 정강이나 허벅지를 부딪쳐도 통증은 몸에 고착되어 벌써 ‘거기’가 아프다. 상대에겐 대수롭지 않고 아주 사소해도 본인에겐 늘 예민한 부분이어서 아물지 않게 은밀하게 생채기를 낸다.

 

그래서 보면 ‘또 그때 그 얘기’를 한다. 아주 오랜만에 서로 안부를 묻는 것인데, ‘아직도 이고 있는 것’이 수치심이다. 뭘까? 다음 주에 만나기로 하고 아이와 같이 화장실에 갔다. 아이는 나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보았고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였다. 조용히 또는 은미하게,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굳이 풀어헤치지 않아도 되는 말이 있다. 너에게만 조용히 따로 전하여야 하는 말도 있다. 나에게 가장 예민한 수치심으로 말하기.

 

아이가 돌아가고 설교문 초안을 작성하다, 아내가 수업을 끝내고 기도회로 나오겠다는 걸 딸애도 늦게 온다니까 집에서 하자고 하고 돌아왔다. 날씨 탓에 종일 몸이 아팠다.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삼손 이야기가 있는 사사기 13장부터 16장까지를 같이 읽었다. 그 내용이 파악이 안 되는지 아내는 자꾸 물었고 나는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읽기와 보기는 다르다. 말하기와 듣기는 다르다. 끙끙거리며 어디가 아프다는 것, 그것이 나를 며칠째 우울하게 한다는 걸 아내에게 고백하였다.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는 나아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절망했다.

 

그럼 또 그런대로 사는 거야. 아내의 간단한 처방이 때론 귀한 약이다. 정답이지 않나. 그럼 또 그런대로 사는 게 순종이지 않나? 내게 묻는 듯하였다. 이를 자극해봐야 공포심만 극대화하여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항변하게 한다. 원망이 나오는 것이다. 겨울이라 더 그래. 아내의 명료한 정의가 속 시원하였다. 다시 파스를 여러 곳에 붙이고 침대로 들어갔다. 딸애가 아직 귀가하기 전인데도 곤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두려워 말라’는 표현이 성경에 365번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어디서 읽었다. 이는 매일 한 번씩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뜻으로 해석을 더하고 있었다.

 

맞는 말 같다. 기껏 아이 앞에서는 달관한 사람처럼 굴면서, 나는 나로 인해 쩔쩔맨다. 우리는 얼마나 유약한 존재인지. 단 한 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없다면 그 공포심에 눌려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아픈 게 무섭고 아플 게 무섭고 아파서 주를 원망하게 될까봐 무섭다. 남들에게 했던 말에 반에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살까봐 두렵다. 말씀만 먹지 이를 소화하지 못하고 사는 건 아닌지, 누구를 생각하고 기도한다지만 더 개입하는 걸 꺼려해서 생겨나는 방어기제는 아닌지, 그렇듯 결정적인 순간에 주를 외면하게 될까봐…. 몸의 통증은 단순히 몸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처럼 영혼을 유약하게 만든다.

 

그런 내게 왜 또 저런 아이를! 아이의 수치심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모름지기 내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텐데. ‘내 양을 먹이라.’ 하실 때 내가 먼저 주의 양인 것을 호소하게 되는 마음이 정직하였다. 이미 충분하다고 하시는데 나는 갈급해하는 기타 등등의 고달픔에 대하여 나는 무섭다. 정말 내가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는 있는 것인지. 멋진 표현으로 밑줄 긋고 메모해두면 딱이지, 그걸 사역으로 감당하기에는 내가 너무 유약하여서. 나의 못나고 상한 감정을 주께 아뢰다보면 한도 끝도 없다.

 

자꾸 내게 집중하려는 마음과 곁에 두신 ‘저 아이’를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과 충돌한다. 난 나를 놓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저를’ 놓고 내 기도를 들으시려 한다. 누워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혼자 말씨름을 하다 잠이 든 것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시 140:13).” 다윗의 고백이 아름답다. 말씀 앞에 황홀해하려는 데 주께서 내 어깨를 흔드시는 듯,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겔 34:18).” 물으시는 것 같다. 내가 주께 향하는 마음을 귀히 여길 필요는 없다. 주께서 내게 얼마나 집요하게 향하시는가를 안다면, 기타 등등의 고통도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프니까 아픈 게 보인다. 늘 수치심으로 시달리니까 상대의 수치심이 먼저 느껴진다. 그래,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가는 법이다.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19).” 나를 더욱 주께 향하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시 140:1).” 하는 기도를 내 것이 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6).”

 

내 안이 온통 전쟁통이라. 사는 날 동안,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7).” 곧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12).” 가까운 미래에 아이와 함께 주 앞에서 예배하고 찬양할 것을 소망하며.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