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전봉석 2017. 12. 1. 07:14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그 문 벽을 측량하니 이쪽 두께도 여섯 척이요 저쪽 두께도 여섯 척이라 두께가 그와 같으며

에스겔 41:1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편 147:10-11

 

 

 

성전과 지성소 그리고 각 골방들에 대한 환상이다. 환상 중에도 에스겔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가림막인 휘장이 찢어진 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이제 우리는 담대히 주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전에 그러니까 엉터리로 지낼 때에도 나는 가끔씩 형식적인 기도에서 우리 글방이 주의 성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내가 목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을 때이다. 누구에게 말했다기보다 혼자 속으로 기도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목사님, 저는 여기만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잘 정돈돼 있어서 그런가, 하하. 사장은 너스레를 떨 듯 그리 인사를 건넸다. 그의 말에도 나는 문득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아닌, 어떤 무엇의 경우를 생각하였다.

 

중3 아이가 순순히 제 발로 글방에 온다. 가겠다고 하니 아이엄마도 그게 신기하여 아내에게 꼬치꼬치 물었던가보다. 내친김에 나는 아이에게 주일 날 예배에 나오라고 하였다. 학교 끝나고 오는 길이야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그렇다 쳐도, 아이의 집은 인하대쪽이라 전철로 30분은 족히 걸린다. 교회를 다녀봤다는 말로 아이는 전혀 생소할 게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다음은 성령이 하실 일이다. 나는 권하였고 아이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니, 봐서요! 하는 아이의 말을 주께서 붙드시기를 기도하였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살피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내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서서 주께 간구하는 소리를 주께서도 들으신다. 마침, 김장을 막 하고 오는 길이라며 사장네 방에서 보쌈과 겉절이를 조금 보내주었다. 아이와 같이 그 음식을 놓고, 내가 기도할게. 기도하고 먹자. 하고 아이를 기도로 이끌었다. 젓가락을 짚던 녀석도 손을 멈추더니 눈을 감았다.

 

은연중에 나를 어려워하는 게 아니라 주를 의식한다는 것을, 글방을 조심하는 게 아니라 거기가 교회인 것을 깨닫는 것이다. 누가 뭐랄 거 없이 그리 되어지는 일에 대하여 가끔씩 나는 지금도 놀라곤 한다. 대학동기들이 단체 카톡방을 만들어서 저들끼리 송년모임을 약속하다 나를 불러들였다. 서너 친구가 목사님! 하고 인사를 건네자 술렁이던 방이 조용해졌다. 누군 불편해하고 누군 또 궁금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교회는 어떠한가? 하고 물어서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다. 잠깐 대화를 하고 나는 알림을 껐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시는 일. 주의 종이 주의 종으로 여김을 받게 하시는 일. 무얼 꾸미고 어찌 노력하여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말을 공손하게 하고 행동거지를 바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주가 하시는, 그 일. 함부로 여김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말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 보면 내가 하나님과 먼저 화목하게 하시고, 후에 나로 하여금 저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의 화목을 도모하게 하시려고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마침, 낮 동안에 읽은 책 내용이 ‘용서’에 관한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가장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겠다. 남을 용서하는 일보다 자신을 용서하는 일에서도 또한 이를 용서하신 이와 화목하게 되는 일에서도, 용서는 단회적인 게 아니라 꾸준히, 날마다, 연거푸 계속 되는 일이었다.

 

그렇겠다. 시맨즈의 결론도 그것인데 성경의 가장 주된 핵심이 용서였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보면 저들 마음속에는 용서가 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있다. 해봤는데, 다녀봤는데 하는 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데 따른 억하심정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요구에 대한 거절을 경험한 영혼은 공연히 하나님을 싫어한다. 용서되지 않은 감정은 곰팡이처럼 잠식하며 번진다.

 

그래놓고는 다들 잘 짜인 변명을 오래된 외투로 걸치고 산다. 뭐라 한들 들리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자신은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왜 하나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이다. 곧 부당한 쪽은 하나님이지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어서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다는 데 근거를 둔다. 다녀봤어요, 할 때의 그 아찔함이라니. 차라리 아예 교회를 안 다녀봤거나 심지어 타종교를 믿는 경우가 훨씬 수월하다. 사장도 자신의 어릴 적에 가져봤던 신앙을 운운하며 어느 지점에서 규정지은 것이다.

 

더는 다가갈 수 없거나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는 지점에서 용서되지 않는 무엇을 맞닥뜨린다. 주로 사람에 대한 실망을 핑계로 댄다. 교회에 대한 시스템을 또는 어떤 교리를 운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알리바이다. 자신이 자신을 두둔하기 위해 꾸며놓은 잘 짜인 변명거리다. 최종적인 이유는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또는 자신이 혹은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을 대하는 처사가,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였다. 말로는 누굴 미워하지도 또는 원망 같은 거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다. 그리 요구하였던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명은 거의 본능적으로 작동한다. 그저 씨익, 웃으면서 농담으로나 받는 경우도 그래서다. 나는 다 아니까 당신이나 잘 믿으시오, 하는. 실은 그 안에 하나님께 대한 충족되지 않은 요구조건들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해주시라, 하는. 어떻게 했으니 어떻게는 해주셔야 한다는. 실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일도 보면 이와 같은 조건에 시달리는 경우이지 않나 싶다. 하나님이 무엇까지는 해주실 것이라는 요구조항을 내걸고 당연히 그러셔야 할 것처럼 성경구절을 근거로 든다거나 누구의 사례를 예로 삼는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데서 용서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결국은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그렇지 않고는 어찌 설득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나야말로 얼마나 풀리지 않는 숙제를 떠안고 살았던가? 그러면서 용서를 위장하자니 곳곳이 앙갚음의 골이었다. 이만큼 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나름의 속단이 제일 앞섰고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당연한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특히 믿는 사람들의 속단은 미래에 대한 권리를 당연하다는 듯 주장하는 것이다. 저 천국을 무슨 보상의 차원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그래서고. 어쩌면 죽고 난 뒤 여기저기서 원성이 터져 나오는 건 그 때문이겠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아이는 불쑥 초등학교 때 다녀봤어요, 하는 말로 긴 여운을 남겼다. 그러든 말든 나는 ‘와 보라’ 하고 아이에게 말하였다.

 

길게 들을 게 없는 게 그와 같은 변명은 평생으로 이어진다. 상습적인 것이다. 매순간이 핑계다. 순식간에 일어난다. 매사에 그렇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변명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알리바이를 꾸며낸다. 스스로도 거짓인 걸 알면서 스스로 먼저 속고 싶어 한다. 너무도 완벽하고 흡족한 자기변명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밀어내고 교회를 멀리하는 근거로 삼는다.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듯 마땅치 않은 건 그 때문이다. 하나님이 언제 내 편이었어? 하는 억하심정.

 

그러니 어쩌나. 나도 내 스스로 그게 돼서 이리 된 게 아니지 않던가? 주의 강권하심이 필요하다. 새 사람을 입히시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럴 때, 여기만 들어오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목사님 앞에만 앉으면 내가 할 소리 못할 소릴 다 합니다. 하는, 나야말로 그게 그러니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아이가 오겠다면서 엄마의 만류를 거절했다는 데 내가 더 어리둥절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그것이었구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그러므로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 주가 이루신다는 보증. 곧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 나를 여기 두시고 내가 뭘 해서가 아니라, 저들로 뭘 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을 목격한다. 한 영혼을 위해 우린 기도한다. 아내와 딸애가 올라와 같이 하루를 마치며 기도한다. 우리 교회가 이웃하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게 해주십사 하는.

 

그래 맞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0-11).” 내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은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고 또 경외하는 거였다. 내가 능력이 있고 나름 수고하고 애쓴다고 이루시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내가 이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나를 자라게 하시려고, 우리를 자라가게 하시려고.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