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은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으로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에스겔 45: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1-2
성도의 의무는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구별된 재건의 때에 반드시 구획하고 나누어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에 대해 정리해주고 있다. 이는 교회가 하는 일이고 성도로서 가져야 할 도리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린 하나님이 그처럼 돌보시는가. 늘 쪼들리는 것 같지만 또 그때마다 채우시고 다스리신다. 조금은 넉넉하였으면 싶다가도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도 하신다.
나야말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어야 하지 않겠나. 뜬금없이 지난달에 이사 나간 옆 사무실 사장이 들렀다. 이쪽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그리 되었던가보다. 부산하고 초조해보였다. 나름은 한갓지고 편안해졌다고 하지만, 다 정리하고 며칠 앓았습니다. 저의 말이 안쓰럽게 들렸다. 그렇기도 하겠다. 남한 사회에 내려와서 그토록 열심을 다해 일구려던 것을 다 정리하고 들어앉은 셈이니.
요즘은 보험사원으로 교육을 받고 어디에 속한 모양인지, 그 일에 대한 보람을 열거하느라 꽤 긴 말을 하였다. 두 아들아이들은 어떤지, 당신은 여전히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지, 나의 관심사를 물었다. 이런. 하필 또 사기 비슷한 걸 교회로부터 당했구나. 탈북학생들을 이끌어 유럽 여행을 기획하던 모 교회 어느 선교단체에서 기껏 인터뷰하고 어디에 홍보용으로(?) 아이들을 들추고 다니더니, 무슨 꼬투리(?)를 들어 결국 두 아이만 빠지게 되었던 모양이다. 말이 워낙에 두서없이 이어지는 통에 나는 사건의 전후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교회에 대한 기대가 자꾸 무너지는 것이다. 아이들이야말로 그 실망이 매우 컸다면서 한참을 내게 억울함을 호소하듯 말하였다. 속상하였다. 그게 아닌데, 하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니 목회자는 교회가 책임지고, 교회는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한다. 그런 걸 목회자가 교회를 책임지려 하고, 성도가 교회를 누리려고 하는 꼴이다. 무슨 대기업 흉내를 내듯 자선사업에 열을 올리고 지역사회의 일에 일일이 끼어들어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려고 드니, 대충은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교회가 사업이 됐다. 어느 단체를 끼고, 저들은 그걸 빌미로 홍보하여 스폰서를 구하고, 후원을 받고 협찬을 얻어, 알게 모르게 이문을 남기고 자신들의 단체를 알려 세를 확장하려고 드니.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왔다. 교회가 더하다는 저이의 말이 안타깝게 들렸다. 그리 접근하는 그와 같은 태도도 문제겠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또 아이들은 어떤지, 당신은 좀 안녕하신지. 그 영혼이 어떠하신지. 그래서 좋은지.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보험 행각을 벌이로 삼고 있으니 것도 내가 또 뭐라 할 말은 아닌 것이고, 죽기 살기로 내려온 땅에서 더욱 처절하게 죽을 똥 살 똥 살아가는 저이네 모습이 답답하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언제든 아이들이 하겠다면 보내시라. 또 오시라. 주일에 같이 예배드리시자.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저 말만하다 갔다. 돈돈거리며 다니는 삶이 되었다.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일의 보람을 운운하지만 그건 다 자본주의가 주는 사탕발림인 것이고.
종일 혹독한 겨울 날씨였다. 낙엽은 뒤엉겨 바람에 쓸려 다녔고, 그 많던 새들과 곤충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파란하늘이 청명한 만큼 바람은 매서웠다. 12월은 하찮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웽웽거리며 날아들던 날파리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인천논현역 앞에는 간간히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어깨를 한껏 웅크린 채 담배를 빨아댔다. 연기는 가뭇없이 허공에 흩어져 바람으로 사라졌다. 12월은 있음과 없음이 혼돈한 계절이다. 나는 저이의 말을 들으며 그의 옷차림에서도 12월을 느꼈다.
뭐라 한들 뭐라 하니 알아듣기나 할 소리이겠나. 온통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아이들 이야기에서도 장래를 운운하며 뭘 해야 벌어먹고 살지를 고민하는 경우라,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췌장암 3기 진단을 받고 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친정엄마 이야기를 하다가는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였다. 그처럼 덧없는 것을. 저이는 이들보다 앞서 2004년도에 내려왔다고 했다. 10년 만에 재회하고, 3년을 모시고 살다 허망하게 보내드렸다는 데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에도 여전하여서 그 어미의 삶을 따를 것인지.
죽기 살기로 그저 사느라 여념이 없는 것들에 대하여 허망함은 여름날 극성맞던 벌레들이 일깨워준다. 하루살이가 얼굴 앞에서 뒤섞여 날아들면 허공을 휘익, 저어 저들을 쫓아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가열하였는데, 그처럼 격렬하던 생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새들은 어디로 가서 생을 마감하는가? 여름내 새들의 그늘이 되어주었던 낙엽들만 시치미 뚝 떼고 바람에 허허로의 쓸려 다니는 하루였다. 애초부터 그런 건 없었다는 듯 바람에 풍화된 흔적은 찾을 길이 없는 법이다.
우리들의 생은 다른가? 억척스럽게 사느라 사는 데 드는 비용이 참으로 가혹하다. 형편을 빤히 아는데도 저마다 명품을 갖춰 입고, 들고 등교를 한다. 모두 익숙하여 입이 쩍, 벌어지는 브랜드로만 가방을 들거나 옷을 챙겨 입은 아이들을 보면서 한 철을 날다 스러져간 벌레들을 생각하였다. 12월에는 그래서 있음과 없음이 길 위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무엇이 진짜인지 어느 것이 헛된지. 자연은 그렇게 계절 때마다 알려주는 데도 우리네 사람들만 모르는 것 같다. 본래 그런 거에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영혼 없는 사람처럼 산다.
이를 일깨우는 말씀이 시편 1편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 복 있는 사람은 허망한 것에 자신의 생을 허비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그저 그럼에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겨대지 않는다. 그러느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이를 즐거워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 결국 우리의 뿌리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4).” 그저 남들처럼 살려고 사느라 기를 쓰고 기를 쓰느라 소진되어가는 영혼에는 관심도 없다. 언제 그처럼 가열하였나. 격렬하게 사랑을 한 것 같고, 격렬하게 자기 일에 매진하여 보람을 느낀 것 같은데,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2월의 바람은 이를 증명한다. 뿌리 없는 모든 것은 쓸려 다닌다. 쓸리다 흩어져 바람이 되었는지, 있음과 없음의 경계는 모호해지는 것이다. 본래부터 없음이었는지, 아직 있는 것들은 이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더욱 겸손하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내가 저들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이기 때문일 뿐이다.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인 것을 마치 나의 수고와 애씀으로 이룬 것인 양 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5).” 무슨 수로 12월의 바람을 견뎌낼 것인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을. 흩어져 어느새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구름이었나, 분별도 되지 않을 인생에 대하여. 그러므로 견딜 수 없는 심판이었겠으니. 우리는 아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언제든 또 오세요. 하고 저를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마음 한편이 휑했던 건 그래서였나보다. 저가 내게 오는 것도 신기하지만 내가 저더러 오라 하는 것도 신기하였다. 이제 막 탈북한 이들이 하나원에서 나와 아무 것도 알지 못할 때, 저는 그들을 만나 보험을 소개하고 돈벌이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일깨우고 다닐 텐데. 나는 혼자 속으로 저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으면 참 유용하겠다, 그리 생각하였다. 그리 수고하고 애쓰면서도 내적인 기쁨이 없는 것이니. 가끔 이렇게 살자고 목숨 걸고 내려왔나 싶어요, 하는 저이의 말이 황망하였다. 일찍이 12월의 바람은 이를 알려주고 있었으니.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나는 해야 할 말이면 하게 하시고 들어야 할 말이면 반드시 듣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간절한데 저이는 자기 말을 놓지 않았다. 할 말이 많은 것이다. 애써 수고하는 것에 대한 자기 항변이 가득하였다. 그러니 뭐라 한들. 나는 고개를 끄떡거리며 주께 기도하는 수밖에. 느닷없는 그의 방문이 괜한 게 아니기를. 바람의 길을 나는 알 수 없으나 그 많은 풀벌레의 주검과 새들의 주검과 낙엽 사이사이 수많은 곤충들의 주검을 안고 바람이 되어 날아갔다.
나는 12월의 바람에 콧등이 찡해서 방한용 마스크를 샀다. 빈틈없이 옷을 껴입고 12월로 나서보면 있었음과 없었음의 길은 혼재하여 본래부터 무(無)였던 듯 시치미를 뗀다. 그래서 12월에는 길 위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무릇 의인의 길’이란 여호와께서 인정하는 것이었으니.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욥 5:7).” 그러나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7).”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