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전봉석 2017. 12. 6. 06:58

 

 

 

군주가 올 때에는 이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에스겔 46:8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편 2:6-7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요 주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인 백성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이후 이와 같은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오늘 본문은 이를 상기시키신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교통하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군주가 올 때에는 이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지니라(겔 46:8).” 나는 종종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아무리 하나님이어도 무슨 소용인가. 저를 나의 하나님으로 삼지 못하고 산다면 말이다. 천국이 제 아무리 거룩하고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한들 이를 하나님과 같이 누릴 수 없다면 그 또한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나. 이어 시편의 말씀은 이를 분명히 한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주께서 말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6-7).”

 

이를 다시 베드로의 증언으로 가져오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7-8).” 누구에겐 이와 같은 말씀이 걸림이 될 뿐이다. 거추장스러운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에야 어쩌겠나.

 

아직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는데 알지만 더 나은 걸 추구하느라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나를 군주로 이 땅에 두시는 이가 내 곁에 두시는 이들을 다스리며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군주가 올 때에는 이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백성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 대로 나갈지며 군주가 무리 가운데에 있어서 그들이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이 나갈 때에 나갈지니라(겔 46:8-10).”

 

들고 나는 문이 따로 있고, 이를 엄히 구별하여서 마음을 질서 있게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결코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먼저가 있고 나중이 있다. 우선순위가 분명하여서 이는 하나님과 성도의 교통이 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함부로 여겨 허투루 굴 것을 우리 삶에 두시는 법은 없다. 한데 모든 오락이 한 번 좋자고 드는 경우고, 그저 우스갯소리로 웃자고 드는 데야 감당이 안 된다. 방심할 때 훅, 하고 덜미가 잡힌다.

 

겨울이 되면서 어디가 좀 아팠고 그럴 때면 괜찮겠지 하고 진통제를 먹었다. 며칠 감기 기운으로 몸이 고될 때도 아무 생각 없이 진통소염제를 먹었고, 엊그제는 콧물 재채기 약들을 삼시세끼 다 챙겨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락없이 탈이 났다. 점심을 먹고 글방으로 올라갔는데 순간 식은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리며 어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필 요즘 또 아침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를 즐겼더니 가차 없었다. 얼른 진정제를 삼키고 누워 속을 달랬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한결 나아졌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몸은 마음보다 정직하다. 마음은 정신보다 연약하면서 몸을 다스리지도 못한다.

 

아플 때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생은 한 뼘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 다 소용이 없다. ‘너희는 먼저… 구하라.’ 하는 성경의 진리가 그 문이다. 들고 낢의 이 고귀한 이치 앞에 몸은 언제나 정직하게 반응한다. 덕분에 햇살 좋은 창가에 기대 앉아 등을 지지며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었다. 그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내적 위로’ 부분을 읽으며 나의 기도가 되기를.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주는 저자의 깊은 묵상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렇지. 사람의 길이 어찌 자신의 걸음에 있겠는가.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그 걸음을 지도하심이 걷는 자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내딛다가는 삐끗, 아뿔싸, 난데없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유난히 느린 걸음으로 걷는 나로서는 한 발 한 발의 보폭이 얼마나 소중한지 날마다 새롭다. 이를 더 확실히 알려면 앞 동에 사는 아무개를 보면 된다.

 

저이는 두 다리가 없어 전동 휠체어를 타고 이동한다. 저에게 딛고 서는 일은 다른 동 아무개의 것도 부럽겠다. 그는 풍이 왔는가, 젊은 나이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걷는다. 한 발을 내딛는 일이 한 마장쯤 되어 더디다. 그럴 때면 돌아간 왼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입술까지 씰룩거려야 간신히 다음 보폭을 내딛는다. 점심을 먹으러 올 때나 먹고 나갈 때 나는 종종 저이들을 본다. 그럴 때면 딛고 서는 일에 대해, 내딛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걸음걸음의 경이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내 발로 딛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저들이 내게 묻는 그 물음으로도 나는 충만하였다. 예레미야는 이를 일깨워 사람의 길이 그 걸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을, 하나님의 지도하심에 대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씩 오늘의 나를 놓고 묵상하다보면 그래서 어느 것도 주의 은혜가 아닌 게 없다는 사실.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가져다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그런 거 보면 은혜를 받은 자가 은혜를 바란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바랄 수 있는 게 복이었다. 구하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저들의 취향은 말 그대로 기호에 그친다. 한참 유행하던 무엇이 지나고 나면 그거야말로 애물단지라. 죽고 못 살 것처럼 바라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인 이 땅에서 온전히 주를 바랄 수 있다는 것으로도 이미 소중한데 이를 붙들고 평생의 보폭을 달리히니 것도 희한한 일이라. 아프면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는 것처럼 몸의 간절함은 마음의 변덕스러움보다 빠르다. 주를 섬기는 즐거움을 알게 한다.

 

누워서 수십 번 주의 이름을 되뇌며 그의 도우심을 바라는 일,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이처럼 주께 피하는 자로 누리는 은혜가 크다. 오후께 아이가 오고, 나는 진정이 된 속을 감사히 여기며 아이를 가르쳤다. 누가 주의 사랑에서 끊으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그래서 내가 이길 수 있는 것은 나의 특별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서 나는 넉넉하였다.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이시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시 32:7).”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내가 든든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하고, 당장이라도 119를 불러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공포가 밀려들 때도 내가 언제든 부를 수 있는 이름이시다. 진리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주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나의 무가치함을 또 온전치 못함을 항상 죄로 얼룩져 있고 더렵혀지기 십상인 나를,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시 143:6).” 그리하게 하심을, 아멘.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10).”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