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다니엘 2:17-18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6:9
기도로써밖에는 달리 무엇을 해줄 수 없다.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리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것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내가 저를 위해 무엇을 구해야 하나,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탄식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말씀. 오늘 다니엘서에서 그리 기도하는 것밖에 달리 더 좋은 수가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왕의 말 같지도 않은 성화는 억지스러운 현실과 닮았다.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에 있어 잠시 시간을 두고 기도할 때, 다니엘은 그의 친구들에게 함께 구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8).” 이것이 내가 할 일이고 나에게 두신 역할이겠구나, 하는. 아이엄마와 길게 통화하였다. 시간을 서로 나누고 일대일로 수업을 진행하면 어떨까, 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내면을 두고 하는 말인데 아이엄마는 아이들의 외면을 가지고 그게 어떤지, 뭐가 문젠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따지듯 물었다. 지나치게 밀착관계로 있으면 서로를 바로 보지 못한다. 좀 거리를 두는 게 낫다. 부모 자식 간에도 다를 게 없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속으로 주께 구하였다. 믿는 이였으니 나는 보다 농밀하게 아이의 굳어져가는 마음을 말해주었다. 지나친 간섭과 통제가 그 원인이라 말해주었다. 가끔은 ‘교회 다니는 엄마들’에게서 더 극심하게 나타나는 노파심인 것도 말해주었다. 결국 우리는 아이 문제를 얘기하지만 그 아이로 인해 (자식의 일이지만) 하나님과 나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말해주었다. 한 시간 가량을 통화하였다.
그러고 보니 말해주는 게 나의 역할 중 하나였다. 그러니 기도가 없이는 감당이 안 된다. 아이는 모 재단에서 하는 영재로 뽑혔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마음에 걸릴 정도로 아이의 이기적인, 편협한, 자기중심적인 부분에 대해 염려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수업 시간 문제로 말이 나왔고 서로 이야기하다 그리 길게 이어졌던 것이다.
과잉보호의 지나친 어머니의 밀착관계와 인정과 격려가 결여된 아버지의 차가움이 아이에겐 자기보호를 위한 궁여지책을 모색하게 만든다. 다른 한 아이의 경우 얘는 엄마의 간섭만 피하면 된다. 아무리 엄마가 지나치다 해도 24시간 아이를 감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모든 하루 일과가 속이고 꾸미고 덧대는 데 쓰인다. 아이아버지는 냉혹하여 그러다 홧김에 손찌검이다.
아이의 영혼은 곪아가고 우리는 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같이 기도한다. 다른 덴 다 안 가면서 여기에는 온다. 와서는 잔다. 유아기 아이처럼 투정도 부린다. 그럴 거면 오지 마, 하고 아내는 아이를 윽박질러도 보지만 아이는 그래도 온다. 그러니 이를 아이엄마에게 말해주어야 할지, 그냥 내버려둬야 할지. 우리의 난감함은 기도밖에 없지 않겠나. 내가 직접 거들 수 있는 부분도 아니어서 아이엄만 글방에 가는 시간에 수학이나 영어를 더 하길 원한다. 늘 그 집안은 일촉즉발의 전쟁이라.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단 2:17-18).” 서로 알리고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나는 어제 통화한 아이엄마에겐 나름 신앙이 좋은 이여서 같이 위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할 수 있었다. 하나 이 중1 아이의 경우는 아이엄마가 교회를 떠난 지 좀 된 터라, 그런 말이 귓등에도 들릴 리 없다.
서로 알리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게 복이라. 우리가 누굴 의지할까?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 6:9).” 그러했을 때 행할 길을 가르쳐주신다.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신 11:19).” 내게 그러라고 그와 같은 일을 두신다. 통화가 끝나고 아이엄마를 격려하며 이와 같은 말을 해주었다. 결국은 아이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문제인 것을 말이다.
마치 다 아는 것 같으나 부모만큼 자식을 모르는 이도 없다. 내가 살아보니 그렇더라. 그런데 이를 마치 내가 내 자식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우길 때 오해는 비롯되고 간섭은 성립된다. 나는 사랑이라 부르지만 자식에게는 간섭인 것이다. 참견보다 해로운 사랑은 없다. 가끔은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묵상한다. 그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30).” 아버지는 아버지께 대한 강한 신뢰와 전폭적인 의뢰를 일깨우신다.
우리의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계시지 않나. 결코 무심함이 아니었다. 개의치 않는 냉혹함도 아니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누가는 이를 서술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기도하고 계셨을 것이다. 묵묵히 주를 의뢰함이란 기도를 더함으로 의연함을 이루게 하신다. 아이엄마에게 이를 설명하는 일은 무리였다. 글쎄. 또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왜 뜬금없이 그때, 그와 같은 대화를 할 수 있게 하셨는지 주님만이 아시는 것처럼 말이다. 의뢰함이란 기도로 나타나고 기도함이란 주를 아는 정도에서 순전하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나는 이 말씀을 의뢰한다. 나의 길이 내게 있지 않다. 걸음을 지도하시는 이는 주시다. 저렇듯 아이를 맡기신 이도, 그런저런 이유로 아이엄마와 뜬금없이 통화를 하게 하신 이도. 내가 알거니와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다. 혹여 내가 말을 실수했을까 하여 또 괜한 말을 꺼냈나 싶어 마음이 어지럽다가도 내가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려고, 이와 같은 은밀한 헌신이 우리의 사명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주일 날 아침 겨울비가 내리는지 바깥이 소란할 때, 그것으로 아이들이 주일 예배에 나오는 걸 게을리 할까봐. 이번 주일에는 큰애가 오려나, 하고. 그 애는 계속 약물에 의존하면서도 어찌 잘 지내고는 있는지, 하고. 염려와 근심이 또 이 지독한 마음쓰임으로 주께 아뢰고 구하는 일에 대하여 어찌 저들이 알기나 할까? 이것이 은밀한 헌신이지 않겠나. 가끔 나는 아이와 통화를 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네가 진짜 알면 깜짝 놀랄 거야! 하고 쌩뚱맞은 소릴 한다. 물론 아이는 농담으로 듣고 웃고 만다.
그럴 수 있는 원천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과분한 것이다.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알리려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굳이 내게 필요한 건 묵묵함이라. 그럴 수 있는 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할 때 훼손되는 게 모든 관계다. 주가하심을 신뢰하고, 나는 다만 주께 의뢰하는 수밖에.
아,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구할 것은 은총뿐이라. 주가 다스리시지 않으면 내가 어쩔 것인가? 내 코가 석 자인 주제에 내가 누굴 염려하고 위하고 사랑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주께서 아이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길. 그 마음을 붙들어주시기를. 아이엄마의 어지러운 생각과 조바심에 평안을 더하시길. 큰애의 신앙이 멀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 6: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