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7-18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7:10
왕처럼 섬기고 사는 것들이 있다. 종종 프로필 사진을 보면 무엇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지 대충은 알겠다. 흔히 선망의 대상이 왕이다. 내 안에 좌정하여 나를 통치한다. 다스리려 드는 저의 관할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 보람을 찾는다. 더 나은 이로 그 앞에 서고 싶어 한다. 돈이면 출세를, 자식이면 인정받음으로, 자신이면 만족을 추구하면서. 왕은 굴림하고 우리는 굴종한다. 보편적으로는 자식에 대한 헌신이 우상인 경우다. 모든 촉각이 거기에 곤두서 그것을 부모로서의 책무로 삼기도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든지 것도 나쁠 게 없겠다. 오늘 본문의 조건은 그렇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러니 대명제가 뚜렷한 것이다.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또한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믿고 알고 있지만 설령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단 3:17-18).
우리의 기본이 되는 주(主)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 이를 나눠 ‘그렇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도 주요, 내 일에 대한 자부심도 주요, 나의 신념도 주요, 이 땅의 이치와 가치도 주요, 모든 게 주의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면 어느새 하나님은 주가 아니라 종(從)이다. 그에 딸린 것. 주된 것은 따로 있고, 이를 위해 딸린 허울 좋은 주 같은 종이다. 주종관계가 혼재된 세상에서 덩달아 그리스도인의 삶도 변질되는 경향이 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었다. 내 자식이나 사랑하는 이가 들어가지 못할 천국이라면 자신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알고 산다. 종종 우리는 감상에 젖어 하나님을 개념화하려 든다. 실제가 아니라서 실재의 존재로이기보다 이상의 가치로 또는 추구하는 선으로 의지하려는 것이다. 실은 그게 더 자유롭다고 여기니까 말이다. 이상과 현실은 엄연한 것이고, 이론과 실제는 같을 수 없는 것이니까. 성경은 성경일 뿐 삶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할 때 종교는 위안이 되고 사는 데 따른 유용한 관념이 된다. 더는 아니다. 실제는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상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삶을 추구하려 드는 것이겠다. 오늘 본문은 이를 철저히 깨부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살려주실 것이다. 하는 게 전부였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게 뭐 있나. 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곧 우리가 바라고 알고 추구하는 삶으로, 또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 해도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이시어야 한다는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대답할 필요가 없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이 일에 관하여 나의 전부를 거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데, 우리 교회 목사님이 그렇다고 하던데, 누군 뭐라 하던데, 하는 따위의 의지는 아무 소용도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섬기겠다.’ 결국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궂은 날씨였는데도 꼬맹이들이 예배에 나왔다. 같이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이 원하는 빵으로 식사를 같이 했다. 새삼 내가 아이들과 둘러앉아 공기놀이를 하게 될 줄이야.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으면서도 내게 두시는 일이었다. 아이들이라고 마다할 수 있겠나. 오히려 담백하여 어른들의 눙치는 속셈보다는 대하기가 수월하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아내와 딸애는 남아 공부를 하였다. 오후께 햇살이 들면서 등짝이 따뜻하였다. 나는 아껴 읽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었다.
딱 그 지점, 타인의 일에 너무 관여하지 말라는 대목이어서 놀랐다. 늘 나의 하나님은 책 읽기를 통해 말씀하신다. 내가 저 아이들을 또 누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결국은 나다. 내 문제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여기에는 처자식과도 별개다. 공연히 남의 삶에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다. 개의치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개입하지 말라는 소리다. 유난을 떠는 부류가 있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딤전 5:13).”
예수님은 얼마나 냉정하신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 공연한 동정심이 참견이 될 수 있고 남을 향한 비판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내가 서는 일이지 누구를 대신하는 자리일 수 없다. 하나님이 이끄신다. 각각의 생각과 사정을 아신다. 다스리고 통치하신다. 나의 공연한 오지랖이 될 수 있다. 굳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내 문제로 끌어와 결부시키실 것이다.
나는 오지 않은 아이를 두고 그리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가 편하자고 문자를 하였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나에게 필요한 것은 주의 평안이라. 마음은 저 혼자 근심을 떨고 조바심을 내니 견딜 수가 없다. ‘말과 행동에 주의 하자.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에 관심을 주지 말자. 다른 이를 판단하지 말자. 관계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면서 내 속이 타는 거야 날 위한 것이지 그것으로 저들을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뭘 그렇게 대단히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여기지 말자. 저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 말자. 혀를 끌끌 찰 일이 아니다. 나에게도 주의 은혜가 아니면 속물 중에서도 상속물이 아닌가. 혼자서 노트에 적으며, 이를 생각하고 알게 하셨다. 늘 다짐하며 되풀이 되는 마음이지만 안 오는 거야 어쩌겠나. 나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됐다, 나나 잘하자. ‘마음을 바치자. 변함없이 주를 생각하자.’
그러라고 내 마음도 요동하게 하시는 것일 테니, 겸손함으로 주만 바라자. 그렇지. 그렇게 해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저는 나의 하나님이시지 않나. 나는 바라지만 나의 바람보다 더욱 선하고 온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어서. 너무 나서지 말자. 마음이 앞서는 것도 교만이겠다. 공연하게 마음 쓰는 일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아, 이 명쾌한 답변. 그리하여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하는 고백으로.
왜냐하면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신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11).” 그러므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1).” 주가 아니시면,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2).” 주만 바란다는 게 현실로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가볍게 저녁을 먹었는데, 다시 위경련이 일어 좔좔 설사를 해대면서. 나의 못난 성격을, 이 답답한 마음을 주님 앞에 아니면 내어놓을 데가 없다.
그래 맞다. 참된 평안이란 많이 가져서도 혹은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무감각해져서,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를 바라고 의지함으로 얻는 평안이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그렇지. 다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을 마치 영원히 품을 수 있는 것인 양 아등바등 굴려니까 이 모양이다, 나는.
나는 기도한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2).” 나의 관심의 전부가 되기까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나를 강건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쓸데없는 걱정을 비워버리게 하신다.
너무 얽매이지 말자. 특히 사람에겐 그럴 거 없다. 지나가는 것에 대하여는 미련을 두지 않는 게 상책일 것이니.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2-3).”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시게끔 해야 한다. 그러자면 잠잠히 주를 바라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이를 위해 나는 나의 약함을 주께 의뢰하며.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32:5).” 그리하면 주가 반기신다.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69: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