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가 무엇이기에

전봉석 2017. 12. 12. 07:24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다니엘 4:37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좀 나아졌다 싶더니 속이 다시 울렁거려 좀체 뭘 먹기가 두려웠다.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빈속으로 도로 갔다.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꽁꽁 싸맨 사람들이 칼바람을 피해 휘청거렸다. 그렇게 오고 가는 짧은 길에도 나는 등짝에 땀이 찼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글방 안은 햇살이 가득하여 안온하였다. 창가 쪽에 등지고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을 같이 쓰고 있는 사무실들이 비어있어서 나는 덩그러니 혼자였다.

 

감정에 기댈 건 못 된다. 나는 변덕스러움에 대하여 신물이 나는 사람이다. 현재의 느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 생각으로 움직이려 들어서도 안 된다. 이랬다저랬다 마음은 저 혼자 요동을 치니 어찌 주체할 길이 없다. 이럴 땐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며, 가만히 또 가만히 나를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주목할 것 없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요 12:9).”

 

본래 그런 거다. 대부분이 예수를 보러 간 게 아니었다. 그러해서 겸사겸사 움직이는 걸음은 헛되다. 믿음도 지킬 겸 살 길도 궁리할 겸,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 알고 오니’ 그게 다 허사라.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러했던 무리들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쳤던 군중이다. 오직 예수로만 주를 바라기.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령이 주도하시게 해야 한다. 이는 인내로써 견디는 일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좀 우습지만 나는 언제든 응급실에 갈 준비를 한 것처럼, 옷을 입고 혹시 몰라 택시비 얼마를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그 고통이 막중하였겠다 싶은데 그렇지가 않았다. 속을 비우면 사람이 차분해진다. 본래 그런 것인지, 속이 가벼우니까 왠지 온순하여진 것 같아서 밥 힘으로 억척스럽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금식을 시키시려는가, 생각하였다. 나도 모르게 아이들 이름을 적고 있었고 기도할게요, 하고 인사하였던 이들을 생각하며 주께 고하고 있었다.

 

잘못한 게 없이 늘 잘못을 범하는 게 나다. 내가 얼마나 바르지 못한지, 빈속에 물을 홀짝이다 알았다.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잠 12:13).” 사사로이 여기는 마음이 잘못이었다. 뜬금없이 아이에게서 답이 왔다. 고작 네, 감사합니다. 하는 정도의 것인데 고마움에 와락, 눈물이 번졌다. 그래도 주일을 지켜야 할 것과 여기까지 못 온다 해도 믿음 잃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었다. 24일까지 프랑스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주를 의지하기.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이게 쉽지 않은 것은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이 크다. 내가 나를 신뢰하는 일이어서 그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누구와 싸웠거나, 도둑질을 했거나, 나가서 누굴 해코지 한 일이 없다 해도 나에게 늘 잘못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들처럼 겸사겸사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도 볼 겸 예수가 계신 곳으로 가는 게 잘못이다. 그러니 예수만 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는다?

 

때론 너무 더디고 좀 지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보다 후하지 않고 너무 간당간당하여 감질 맛나서 살 수가 없다. 그러느니 내가 나서서 어떻게 해보는 게 낫지, 싶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속이 볶이는 것은 그만큼 내가 못된 것이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잘못한 게 많다. 어떻게 해야 하나?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그렇구나. 그 자체로 선이었구나. 내가 대체 이 애한테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싶은 모멸감이 잘못이다. 그 정도 마음 쓰고 애썼으면 됐지 뭘 더 어쩌란 거야? 하는 자가당착이 잘못이었다. 부당하다 싶어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 것. 이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움 것이다. 선을 행한다는 기준이 내 만족을 더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주를 생각해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 추운데 아내가 마중을 나와 같이 들어오면서 들었다. 한 아이가 온단다. 그런데 싫다 그럴 거다. 그 애도 싫지만 그 애 엄마가 너무 싫다. 그딴 식으로 그만둘 땐 언제고 다시 애를 보냈으면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아내는 열을 올리며 씩씩거렸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나름 한다고 했는데 마치 잘난 아이를 오히려 망쳐놓은 것처럼 틱틱거리며 그만둔 사례였다. 우리는 씩씩해야지 씩씩거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겠다는 사람을 막아서는 안 된다. 꼴 보기 싫어도, 너무 싫어서 내가 화병이 날 지경이어도, 그러는 게 주님이시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명심해야 하는 이유는 번번이 까먹거나 또는 외면하고 싶은 것이어서 말이다. 사람 정말 싫다. 애고 어른이고 막돼먹은 이는 감당이 안 된다. 안 보면 그만이고 아랑곳할 것 없이 살면 된다. 그리 여겼던 삶이었는데, 우리는 야멸차게 떠나는 사람을 붙들어서도 안 된다. 같이 욕을 해서도 안 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죽자고 덤벼서도 안 된다. 그러자니 속이 오죽할까? 오겠다는 사람 막아서도 안 되고 가겠다는 사람 뒤에서 욕해서도 안 된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아내가 잣죽을 쑤어 몇 수저 뜨고 가정예배를 드리며, 나에게 당부한 내용이기도 하였다. 내가 얼마나 사람을 좋아했었나. 어울려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며 살지 않았던가. 그런 게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만이었고, 야멸차기가 동짓날 칼바람보다 매서웠다. 한 번 안 보면 그 사람이 있는 자리는 가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참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바둑에서 복기하는 것과 같다. 꼭 그런 애만 온다. 정말 이 사람은 싫다, 싶으면 그게 나였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삶이 어떠했는가, 그런 저들의 피폐한 영혼이 어떠할까, 알게 하시기 위함에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그날이 가까움을 알 수 있게 하는 게, 굶어보는 것도 좋다. 속이 비면 사람이 맑아진다. 허튼 생각이 사라지고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는지를 바로 알게 한다. 어느 날보다 단정하여서 주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다. 힘이 없으니 힘이 생겼다. 그렇듯 주를 알게 하시려고.

 

오늘 말씀은 화자가 느부갓네살 왕의 진술을 토대로,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단 4:37).” 저로 알게 하심이다. 다니엘의 용기는 직언으로 이어졌고 이를 듣고 깨닫게 하시는 이는 물론 성령이셨다. 내가 누구에게 뭐라 한다는 건 나의 경험과 사견을 들어 말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행여 서로의 감정이 상하고 이에 모함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 수 있을 때 성경의 역설은 칭송이다. 저가 누구인가? 자칭 신이라 여기는 왕이었지 않나. 두려울 게 없는 삶이었지 않나.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럴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육신도 영혼도 관할하신다. 나 같은 게 뭐라고 주가 나를 이처럼 귀히 여기실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나는 자꾸 더 죽어야 한다. 죽어야 산다. 힘이 없으니 힘이 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인내로 견디는 수는 스스로 행동을 제어하고, 용기를 내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주를 섬기는 일이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91:4).” 내가 나를 변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안 보면 그만이다 싶은데 계속 끌어다 곁에 두시는 이가 있고, 이 사람 참 좋다 싶어 의지하려 하면 엉뚱하게도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그래서였다. 나의 방패시라. 나는 그의 날개 아래로 피할 때만이 가장 안전하였다. 내 생각과 달라서 혼란스러운 거야 볶일 만큼 볶이는 수밖에.

 

내 마음을 하나님께 단단히 붙들려 맡겨야 한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내가 누구라고 누굴 감히 나무라고 탓하고 판단하며 비난한단 말인가. 그러는 거 아니다.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 것은 그 일을 주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무심히 가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것은 그 일을 주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묵묵하여서 포기함으로 얻는 것이 있었으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나는 나만 포기하면 될 일이다. 나를 부인하는 일이 우선이고 내게 두시는 십자가를 지는 일이 이어진다. 참 싫은데, 정말 싫은데 그럼에도 주의 이름으로 지는 십자가로 ‘나를 따를 것이니라.’ 냉혹하게만 들리던 말씀이 가장 온화하여 이보다 나은 게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하신다. 내가 원하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이 바라시는 자리에서, 내가 좋은 사람들로 이루는 게 아니라 주님이 붙이시는 사람들로 합하여서, 내가 꿈꾸는 세상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시는 나라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26).”

 

곧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27).” 그리 행하게끔 하시려고. 그리하여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곧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 그러려고, 그렇게 하시려고. 새삼 주의 은총이 아니면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하시려고,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37: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