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의지하오리니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다니엘 5:22-24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9:10
겁을 상실했다는 말을 흔히 상서롭지 못할 때 쓰이는 말이어서, 장난스럽게도 느껴지고 누굴 겁박할 때 쓰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실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가벼이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지, 것도 신앙이 있다는 경우에 더욱 예사롭게 쓰는 경우가 많다. 오늘 본문에서 저들은 주의 성전 그릇을 가져다 술잔으로 쓰고 사물을 신으로 찬양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호흡을 주장하였다. 그 모든 작정이 하나님께 있음을 망각하거나 무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징조가 사라지고 상스러움이 넘친다. 역전 건너편에서 무슨 집회 신고를 하고, 그 일정이 1월까지라 하니 난감하게 됐다. 난데없이 엊그제부터 목탁과 염불소리가 나고 상여 나가는 곡소리까지 들려 이게 뭔 일인가 했더니, 자신들 이익을 도모하는 데모를 하면서 웬 과장인지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게 점쟁이들이 등장하고 그런 프로를 보며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재미로 흉내 내는 시절이다. 점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니 귀신들도 조롱을 당하는 모양이다.
예전 동기들이 30년 만에 송년모임을 한다며 카톡방을 만들고 누가 나를 초대하여 얼결에 끼어들어 인사를 나누었다. 누가 목사님, 하고 나를 부르니 저쪽에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이쪽에서 아멘으로 화답하는데, 그게 다 농담이라. 웃자고 드는 판에서 뭐라 할 말이 없어 나는 머쓱하였다. 날짜가 정해지고 어디 장소를 확정하고는 나더러 나오라고 하니 것도 참 민망한 일이라. 이럴 땐 내가 ‘아픈 게’ 득이 된다. 누군 전화까지 하여 좀 나오라는 둥 30년 만에 얼굴이라도 보자는 둥 반가움을 표해주어 고맙기는 한데, 내가 그 자리에 낀들.
것도 신기하여서, 이제 나는 싫다. 그리움을 운운하는 일에도 면구스러울 뿐 예전처럼 크게 그립지가 않다. 아쉬움이 사라진 것이다. 내 생의 화양연화라. 가장 꽃다웠던, 그리하여 모든 게 아름답기만 하였던 시절이다. 종종 그리움에 젖어 그런 자리면 마다하지 않던 사람인데, 이제는 그러는 게 싫다니! 내가 나를 갸우뚱할 일이다. 물론 그 자리엔 신앙이 있는 친구들도 여럿 있는데 굳이 내가 뭐라 뭐라 하느니, 그저 몸이 좋지 않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하였다. 은총이란 이런 것이다. 더는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미련을 버린다. 본성과 은총은 그래서 각각 거꾸로 내달리는 열차 같다.
어느 쪽으로든 끌어당기는 힘이 다른 쪽을 멀어지게 하기 십상이다. 본능은 감각을 따른다. 자기를 귀히 여기고 감정에 치우친다. 사랑을 내게 돌린다. 품고 싶고 소유하고 싶어 한다. 은총은 그와 반대로 주께 향한다. 소박하며 단순하고 점점 함께 어울려 너스레를 떨며 회포를 푸는 일보다 주를 바라며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한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는 말, 우스갯소릴 하여 좌중을 즐겁게 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 적당한 허세와 과장된 몸짓으로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여 실제 자신의 유익으로 만족하는 일. 흔히 말해 사람 좋다는 말.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 싫어하는 사람이 없이 두루두루 잘 지내는 일을 마치 덕으로 삼는 경우가 본성의 일이다. 그러나 은총은 그 가운데서 지각을 얻게 하시는 일이다.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욥 11:12).”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사소한 일상에서 상서롭지 못함을 보고도 허허,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자리에서도 허허, 하는 일은 명백한 죄악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그저 다들 웃자고 드는 자리에서 덩달아 허허롭게 웃는 일은 나쁘다. 옳지 않다. 아닌 건 아니다.
오늘 말씀은 이를 명확히 제시하신다. 감히! 두려움도 없이 함부로 구는 세상에서 덩달아 할로윈 축제를 즐기거나 누구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저의 생일을 축일로 추앙하는 일 따위들.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귀신들’ 캐릭터가 상품화되어 생활 곳곳에 스며 있는지 모른다. 이를 분별할 줄 아는 게 지각이며 그 이해가 어디서 오겠나. 은총밖에는 답이 없다. 내 안에 싫은 마음을 두시는 이가 뭔가 불편한, 또는 아닌 것 같은, 그래서 경계하게 하시는 것들에 대하여 본능은 웃자고 들고 은총은 죽자고 든다.
그러게. 다시 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또한 성탄절이 다가온다. 크리스마스는 이제 할로윈 축제처럼 변질되어 저마다 흥에 겨운 일에 매료된다. 상점마다 상술적으로 온갖 캐릭터의 상품을 진열하였고 귀가 터져라 캐럴을 울려대고 있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젠 문화가 되었고 일상이 되어서 이를 뭐라 하면 유난을 떠는 게 된다. 가까운 친구가 전화를 하여 그 송년 모임에 같이 가자고 하였다. 목사가 그런 데 가서 뭐하겠나? 하고 말했다가 그 말이 저의 동의를 얻기는커녕 너무 ‘유난을 떠는 일’로 전달되었다.
같이 술 한 잔 할 수 있는 목사를 원한다. 주변에 또 그런 목회자들이 많은 모양인지, 저는 자신의 신앙에서 별로 개의치 않는 말투였다. 그러니 뭐라 한들? 주님은 내게 그럴 때 쓰라고 신경증을 선물로 두셨다. 하긴 나를 그렇게 붙들어두지 않으셨다면 나야말로 술 한 잔 같이 할 수 있는 목사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그게 뭐 어때서? 너무 유난을 떨지 마. 우리 어디에 모 목사는 술 담배 다 하면서도 목회 잘해. 청년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하는 식으로, 말이 길어질까 하여 짧게 안부를 묻고 통화를 끊었다.
싫은 것이다. 이젠 그러는 게 옳지 않은 것이다. 나도 왜 그러냐고 물으면 왜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모른다. 그저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겠고, 그러면서 그 가운데서 무슨 주의 영광을 바라겠나 싶은 것이니. 은총이 본성을 능가해야 은총이다. 흥청망청 안 믿는 사람들처럼, 그 시간에 술집에서 지난날을 주절거리며 그리움을 달래느니 혼자 외로움가운데서 주를 사모하는 게 더 낫다. 이게 신경증 때문이라 해도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이젠 그러는 게 싫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게 내가 내 힘으로 본성을 이긴 일인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싸우신다. 날 위해 주의 영이 내 안에서 싸우신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나도 실은 누가 아련하고, 나이 듦에 있어 저이가 그립고 함께 했던 그 젊은 날의 시간이 몸서리치게 아련하다. 그런들? 그 허망함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초딩 5학년 사내 녀석이 조그만 일에도 삐쭉 눈물을 흘린다. 글짓기 마치고 아이랑 놀아주느라 10년 내기 공기놀이를 하였다. 져줄 걸 그랬나, 넙죽 이겼더니 아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갔다. 나는 이제 그게 더 마음이 쓰인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모든 게 더 나은 동생’에게 치여 콤플렉스가 심하겠다 싶었다. 키도 동생이 더 크고 공부도 동생이 더 잘하고 부모도 동생을 더 예뻐하니, 아이는 백반증을 치료하고 이를 숨기려고 얼굴을 가리고 왔더랬다. 억눌린 게 많겠다. 아내와 둘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아이를 생각하였다. 이 일이 내겐 먼 그리움보다 가까운 것이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의 애통해 하는 심정을 알겠다.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이 은총밖에 더 있겠나. 나의 본성이 내가 사는 날 동안 이 땅에서는 사라지지 않겠으나, 은총으로 항상 본성을 이겨낼 수 있기를. 꿍치듯 말은 못하고 늘 머금고 있는 나의 불안한 욕망에 대하여, 날마다 매순간 불어넣어주시는 주의 은총이 아니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곧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3).”
어찌하여 나를 질그릇으로 삼아 그 엄청난 영광을 내 안에 두셨는지 알겠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내가 감당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친구 말마따나 ‘목사는 무슨! 유난을 떠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내 안에 두시는 한 영혼에 대하여. 그래서 저 아이를 우리에게 보내셨구나, 하고 아내와 같이 말하면서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 기도이지 않겠나. 아이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응원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아닌 것이라면, 기도밖에는 답이 없겠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