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전봉석 2017. 12. 18. 07:20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내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다니엘 10:19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2-3

 

 

 

아이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가슴앓이는 내 몫이 되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아이들 부모가 나가지 못하게 한다니, 물론 아이들도 그만큼 심드렁한 것이겠으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속만 태우다 말았다. 혹시나 했던 결과는 아이들과 함께 먹으려고 했던 빵만 잔뜩 남겼다. 시무룩하니 주일 오후를 보냈다. 딸애는 인터넷으로 기말고사를 치렀고 아내는 아이들 수업을 위해 교육방송을 보았다. 나는 다 읽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다시 펼쳐서 읽었다.

 

은총이 아니면 나는 살 수가 없다. 밀려드는 오만가지 마음을 밀어내느라 힘이 빠졌다.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말씀이 나를 위로하신다.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내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단 10:19).”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는 서쪽하늘을 올려다보며, 노아는 어찌 그 긴 시절을 견딜 수 있었을까? 미디안을 배회하던 모세를 상상하였다. 저들은 무슨 수로 그 긴 기다림을 참고 견딘 것일까? 체념일까? 순응일까?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큰 은총을 받은 자여. 나를 부르시는 음성으로 들리는 듯하다. 죄악 된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냉가슴 앓는 다니엘에게 주가 오셔서 부르시는 음성이었다. 이는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날 동안 기어이 이고 지고 가야 하는 우리의 마음일 거였다. 아직 어려서, 다들 몰라서, 부모의 신앙 없음이, 그 단면적인 삶을 두고, 주께 대신 나는 기도하고 있을 때에.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10-12).”

 

그러게. 만약에 딸애마저 사역을 나가면 아내와 둘만 남겠다 해서 그런가. 과연 이대로 있어도 되나? 싶은 뿌리 깊은 불신의 의문이 나를 휘청거리게 하는 것이다. 이게 맞나? 이러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아무리 아뢰고 구한들, 이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는 어떤 부끄러움 또는 답답함으로 오후 내내 빌빌거렸다. 그러면서도 다시 아이들 이름을 적고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지, 아이들 이름을 적었다. 나의 적는 행위는 기도였다. 주께 아뢰는 도구가 된다.

 

나에게 우선 굳건한 믿음을 주옵소서. 행여 나는 위로를 구하나,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 25:27).” 스스로 나의 영예를 구하는 일과 같다. 너무 애쓰지 마라. 지나치게 능력 밖의 일을 두고 구하고 바라다 되레 신앙을 잃을 수도 있다. 오히려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것이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기를.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돌아오며 나는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이것으로 족하다.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내가 누구를 대신 구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주가 하실 것을 믿으며. 그러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또 누가 몰라서, 저의 무지함을 두고 안타까워하고 답답해하는 마음이야 나를 성장케 하신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아멘.

 

나는 말씀을 메모하고 떠오르게 하시는 이를 두고 생각하고 기도하기를,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리고 다시 월요일 아침,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렘 42:12).” 이내 말씀 앞에 앉아 주께서 하실 것을 확신한다. 내 안에 소원을 두시는 이가 또한 이루실 것을 믿는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그리하여 나의 필요를 주께 아뢴다. 굳은 믿음과 강건한 마음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고는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는 아내와 딸애가 괜히 더 미울 정도로 나의 마음은 호들갑이었으나 어쩌겠나. 아이들이라 그런 걸, 하고 생각하다보면 어른이 더하지 않나! 뜬금없기는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 우리는 항상 여전할 것이어서 누구도 바랄 것 없다. 오직 주만 바라자.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4).”

 

누누이 나를 일깨우시는 게 주만 보고 하게 하신다. 어떤 보람도 나름의 감사도 혹은 누구의 귀감이 되는 일도 또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어떤 결과도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너는 어떠냐? 하고 주가 물으시는 것 같다. 아브라함이 훌륭하다한들, 바울이 아무리 대단하다한들, 주의 은총이 아니고는 그의 자비하심이 아니라면 나는 무얼 붙들고 설 것인가. 너무 낙심하지 마라. 고민할 거 없다. 이와 같은 표현이 내가 읽고 있는 책에 그대로 쓰여서 나로 하여금 읽게 하시고 들려주시는 주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거절하시다 일순간 허락하신다. 기도를 시작할 때는 미루시다가 마칠 때 순간 응답하신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간구함으로 인내하고, 확신함으로 받아들이며, 겸손함으로 부지런하여, 주의 말씀을 간직하기에 게으르지 않으므로 실천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주의 것이오니, 주가 나를 이루소서.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잠 3:34-35).” 그렇지. 그러하여서 그러함에 대하여 나로 하여금 바로 알게 하시려고. 묵묵히 주님 앞에서만 서 있게 하시려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감사하라.’

 

나를 포기하고 주를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 주만 바라며 구하게 하시려고. 말씀의 빛이요 양식으로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하신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는데 하물며 누구를 운운하며 뭘 어쩌겠다고 마음은 저 혼자 들쑤시곤 하는지. 나를 향하신 주의 자비하심이 너무 고마워, 이를 다만 곁에 두시는 이들에게 증거 하게 하시는 것이다.

 

무심히 주어진 삶을 살면서 주신 데 따른 감사의 이유를 잃지 않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투명한 양심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주시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도우시는 것이겠으니. 나는 되레 아무도 오지 않은 주일 날을 보내며 마음은 선명하여졌다. 그러니 무엇을 바랄 것인가? 누구에게 기대할 것인가? 다만 나의 모든 것을 주게 바치는 것으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그러므로 나의 이 조바심마저도 주 앞에 버려두게 하신다. 내 몫이 아닌 것이다. 가슴앓이야 그러므로 주를 바라고 구하는 일이겠으니, 것은 또 나를 성장시키시고자 하는 주의 허용이실 테고. 나도 내 것이 아님을 주 앞에 고백하려면 내 안에 이는 아쉬움도, 서러움도 내 것이 아님을 주께 아뢰는 일. ‘포기하라. 무조건 포기하라.’ 내 마음을 주께 드린다는 것은 내 안에 이는 안타까움까지도 내어드리는 일이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그저 다만 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아내와 딸애 앞에서 기운 빠져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설령 아무도 앞에 두지 않으신다 해도, 그래서 드는 여러 속절없는 마음까지도 주께 내어드리며 나는 다만 주의 길을 즐거워해야 할 일이었다. 아, 이 큰 교훈을 오늘 아침 내게 주시려고 그처럼 지난 날 오후 내내 가슴앓이를 하게 하셨구나. 혼자 속 끓이며, 애태워하며 서러워하기도 하다, 화가 나기도 하던 마음에 대하여. 그것까지도 주의 것이라!

 

이처럼 나를 살리신 이가 또한 아이들을, 내 안에 이는 안타까움의 대상을 향해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시겠나!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1-23).”

 

결코 내가 저들보다 나음이 무엇이라고.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답답하기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 그게 누구였었나?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5).”

 

곧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7).” 이와 같이 주 없이 살 수 없음을.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86:4).” 이는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147:5).” 이에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히 5:3).”


그러므로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내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단 10: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