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들이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몰락하리라
다니엘 11:3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것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주권도 주의 것임을 오늘 본문은 일깨우신다. 장구한 역사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왕조가 흥하였다가 쇠고 다시 어느 나라가 굳건하였다가 쇠락하는지, 그 모든 주권은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신다. 이에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들이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몰락하리라(단 11:33).” 가르치나 가르침을 달게 받지 않음으로 몰락하는 일은 자명하다.
죄로 인한 사람의 출발은 어머니로부터의 분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도 없이 많은 괴리로 이어지며 그 시달림은 끝도 없다. ‘가르칠 것이나, 몰락하리라.’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인물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사울 왕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의 열심이 그를 삼켰다는 데 놀랐다.
저는 순수하였으나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였다. 전쟁에 쫓겨 스스로 제사를 지냈으며(삼상 13:8-18), 궤를 곁에 두는 일을 미신적인 행위로 삼았고(14:16-23). 기껏 전쟁 중에 백성들을 금식하게 하였으며(24-30), 그의 ‘무리한 거룩’의 민낯은 예배를 뒤로 미루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35).” 엉뚱하게 죄를 물어 스스로 궁지에 몰려 아들 요나단을 죽을 죄인으로 삼았다(36-42). 겉은 승승장구하였으나 속은 문드러졌다(52).
아침에 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참혹하였다. 나름은 얼마나 순수했으며 열심을 다했고, 주를 바랐으며 거룩을 도모하였는지 모른다. 그런 저의 가장 큰 오류는 자기를 포기하지 못함으로 스스로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일보다 앞세웠던 것이다. 오후에 이어서 읽던 리엔 페인의 <깨어진 형상>에서 동성애적인 사랑이 극한 자기애의 하나인 것으로 저의 특징은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부여잡고 자기만족의 보상을 희구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비롯된 사람과 자연의, 사람과 사람의 분리로 이어지는 죄의 한 단면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처음 사람 아담이 자기 판단을 기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저의 형벌은 추수와 수확의 열매로부터 분리되어 피땀 흘려야 간신히 얻는 노동의 참혹한 현실로 내몰렸다. 여자는 임신의 고통으로 당하게 되었고 저가 줄 수 있는 첫 사랑의 기로는 자신과 아기를 분리하는, 탯줄을 자르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바르게 구성하여 극복하지 못했을 때 왜곡된 사랑으로 편향되고 급기야 동성애적인 극한 애착의 단계로 접어든다.
아,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오늘 시인의 질문이 가슴 저리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스스로 주의 장막에 머물 수 있겠나. 그의 성산에서 살 수 있겠나. 이와 같은 결핍으로 우리는 점점 더 자기 몸에 애착하고 서로를 탐닉하는 즐거움에 도취되는 것이다. 주의 뜻을 온전히 바라고 섬기기보다 자신이 나서서 무얼 어떻게 해보려는 충동이 우리를 점점 더 기형적인 사람으로 내몰아 괴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이를 얻기 위해 거짓과 떼, 어깃장과 분노를 익히면서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만들어간다. 곧 불충분한 사랑으로 자기 스스로 자기충족적인 사랑을 갈구하면서 급기야 동성애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처럼 자신과의 사랑에 빠진 미소년, 급기야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황홀해하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색정증.’ 곧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행각에 내몰리는 것이다.
‘날 때부터 어머니로부터의 분리, 그 떨어짐의 상처를 안고 바동거리는 인생은 급기야 자신의 성기를 부여잡고 자기만족의 자위행위로 빠져드는 것’이라고 기독교인 심리학자 프랭크 레이크는 말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도우심밖에 없다. 나는 이런 탐닉에서 단박에 벗어나는 체험을 했다.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모든 걸 끊기로 작정했을 때 그처럼 벗어나기 어렵던 흡연욕구와 성적욕구와 자기애착이 사라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신대원을 시작하면서 나의 첫 번째 기도도 그것이었다.
월요일은 수업을 두지 않아 종일 혼자였다. 오전에 읽었던 성경에서의 사울의 경우가 오후에 읽은 ‘깨어진 형상’과 연결되어, 나는 더욱 주의 은총을 바라고 구하는 마음이 되었다. 책에서 언급된 C. S.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란 책을 다시 꺼내어 읽을 생각도 하였다. 저가 표현한, ‘천상계는 구속받지 못한 자들(자아와 지옥을 선택한 자들)이 결코 본향으로 삼을 수 없는 실재’에 대해 메모하고 오래 생각하였다. 천국을 상상하고 있으면 사는 날 동안의 이 땅의 여러 어려움이 가벼워진다. 죽는 게 고마운 일이 된다.
그렇지. 선은 농익을수록 악과 구별된다. 다른 선과도 구별된다. 선은 반드시 절대 선을 지향한다.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삼고 산다는 일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지. 다른 모든 일은 그리 중요한 게 될 수 없다. 여행을 하는데 모든 짐을 꾸려 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성경은 오른쪽 눈과 오른쪽 손도 두고 다니라고 하신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만일 내가 의지하고 바라고 나서서 취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오른쪽 눈이며 오른쪽 손이다. 천국을 향해 가는 이 여정은 더 홀가분해야 한다. 가져갈 것은 주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주를 향한 간절함뿐이다. 그 외의 모든 수고와 애씀은 도리어 ‘사울의 열심’이 되기 십상이다. 어떤 두려움이 생겼다. 행여나 앞서는 나의 마음도 그와 같지 않을까? 그리하여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 1:4).” 얼마나 많은 생이 그저 허사로 돌아가는지.
주께서 갚아주셔야 한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2:25).” 이는 “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9).” 돌이켜 주를 바라지 않는 한 그 생의 참혹함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상대적으로 오늘의 내게 이루시는 주의 은혜가 소중하였다. 종일 나 혼자 들어앉아 이게 뭐하는 건가? 싶게 때론 답답하고 때론 한심하기까지 하나 그렇지 않았다. 주께서 갚아주시리니,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가정예배를 드리며 같이 둘러앉아 성경을 읽는데 딱 그 대목이었으니, 우리에게 모든 건 적당하였다.
때론 힘들고 어려워서 허덕거리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게 적당하였던 것은 주의 은총이라. 나서서 내가 무얼 어떻게 해보려고 할 때 그 사단이 나는 것이니 사울이 그 짝이지 않나! 저의 처음 순수함은 어디서 잃은 것일까? 내 안에 수시로 드는 그와 같은 마음에 대하여는, 주께서 어루만지시며 용서하여주시기를. 그래서 나는 나의 늙어가는 것을 사랑한다. 그처럼 바동거리며 힘겨워했던 날들에 대하여, 부디 우리 아이들은 그 길로 돌아오지 않기를. 늘 되풀이 되는 이 땅의 고단함에 대하여.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13).” 이를 내게 더욱 알게 하시려고.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렘 18:10).”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제일의 수고는 주를 바라고 구하는 일이었다.
주일을 지나고, 특히 음울하여 마음이 산란한 월요일에는 말씀으로, 책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하시는 주의 인자하심이 감사하였다. 허튼 생각들을 접어두게 하시려고, 굳이 내가 나서서 씨름해야 하는 일이 아니어서 더는 마음에 두지 않게 하시려고. 종종 신기한 것은 어느 주일 날은 유난히 마음이 어려워 쩔쩔매고 나면 어김없이 그 다음 날 월요일 한 날을 깊이 부르시는 것을 느낀다. 혼자 있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말씀을 더하시고 읽는 책마다 그 내용을 연결지어놓으셨다.
그리고 곤한 잠을 허락하시고 이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 앉아 그게 무엇이었는지, 함께 나누게 하신다.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이면 내 마음의 소리들이 잠잠해진다. 어수선했던 생각들이 정돈이 된다. 말씀이 늘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거였다. 그렇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이 말씀이 좋다. 좋으면 좋을수록 나의 늙어감이 감사하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5).”
숱한 왕조가 왕조를 이어 생성되고, 새로운 것이 항상 낡아져 새로운 것에 밀려나면서 이 모두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 하는 것을,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럴 거 없다. 너무 마음 쓸 일 아니다. 그 문은 너무 좁아서 나 혼자만이 들어가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 7:13).” 이를 회피하지 말자.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훗날에 이를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