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전봉석 2017. 12. 21. 07:0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호세아 1:10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시편 17:14

 

 

 

계속 세워두기만 하는 차에 돈은 자꾸 들어가고, 그러느니 팔기로 하였다. 막상 그렇기로서니 서운하기가 또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 마음이 참 어지간하였다. 무엇이고 정드는 게 무섭다. 아들애가 새벽에 귀국하였다. 둘러앉아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서둘러 잠들었다. 사는 날 동안 사는 일을 분깃으로 삼는다는 게 어리석은 것임을 오늘 말씀 앞에서 생각한다.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들로 만족하고 남은 산업에 열중하는 일에 대하여.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시 17:14).”

 

아, 그러는 삶에서 나를 건져주시기를. 나는,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다만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삶이되기를. 녀석은 이런저런 진로를 놓고 그 기준을 삼는 게 돈벌이, 밥벌이였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우선하는 것 같아 짧은 대화에서도 그건 아니라고 일러주었다. 돈을 좇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바라기를, 사람을 좇는 게 아니라 주의 나라를 구하기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를 어찌 알게 할까? 훈계하고 설득한다고 될 일은 아니어서, 그 나이 때 내가 추구하였던 저 허망한 것들에 대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게 하시기를. 때론 사는 일이 구차해도 그래서 ‘저들처럼’ 사는 게 나은 것 같아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며 그 산업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무슨 낙으로 삼지 않기를. 딱 그런 심정으로 아이의 장황한 설명을 들었는데, 아침에 이렇게 내게 두시는 마음이 주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무엇을 유업으로 남겨줄 것인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써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소유가 결코 축복의 전제 조건은 아니라는 데 확신을 더한다. 전날에 화장실에서 넘어져 엄지발가락이 너무 아팠다. 종일 그 작은 통증에 쩔쩔매는, 살아있는 자의 나약함에 대하여 두 손 들었다. 고작 그 정도인데 무슨 이상과 꿈을 목표로 삼을 것인지. 초딩 아이들 수업을 하는데 한 아이가 늘 빈집에 들어가기 싫어 떠돌 듯 배회하는지라, 갈 데 없으면 도로 오라고 했더니 세 아이가 다시 왔다. 책도 안 읽겠다고 하고 글 쓰는 건 더욱 싫다고 하면서 자꾸 수선을 떨어서 <소올 서퍼> 영화를 틀어주었다.

 

서로를 주께 향하게 하는, 나의 역할은 그런 것이려니. 돌아오는 주일에 천 원짜리로 선물교환을 할 생각에 아이들이 들떠 있었다. 아이는 아이라. 잰걸음으로 달려갈 수는 없겠다. 그럴 때 주를 바라고 주만 의지하는 마음이 아니면 참 감당하기 힘든 게 또한 아이들이라. 그래도 신기한 건 아이들이 내가 뭐라고 날 그렇게 좋아해준다. 허물없이 대하며 구김살 없이 장난을 거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마음 같아서는 성경공부도 좀 하고 같이 그랬으면 좋겠는데, 한참 노는 게 좋을 때니까 어쩌겠나. 그럼 여기 와서 놀아라, 하는 수밖에.

 

어떤 징계의 말씀 뒤에 따르는 ‘그러나’의 역설 앞에 나는 항상 경이롭다. “그러나 …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호 1:10).”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견딜 수 있을까? 가만히 주 앞에 아뢴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시 17:14).”

 

사는 날 동안 출세를 성공을 물질을 삶을 분깃을 삼는 자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게 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인데 자신들 것으로 여겨 자기 배를 채운다. 뻑하면 십일조를 내야 하네 안 내도 되네 하는 소리나 해대고, 교회 오고 헌금 내는 일을 무슨 대단한 벼슬이나 한 것처럼 생색을 내곤 하는 것이니. 저들은 또 자녀들로 만족함이다. 온통 자식들 사진으로 자신의 프로필을 도배를 하는 것을 보면, 아 우리가 우리의 산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무슨 큰 생업으로 삼는 게 곧 죄로구나.

 

저들 가운데서 우리를 구하소서. 나 역시 다를 바 없어서 그저 그게 부러움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여서 때론 기죽고 때론 시무룩하여 의기소침한 나의 영혼을 용서하소서. 이 놀라움을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주가 이루시는 일을 보면 속전속결이다. 우리는 저마다 너무 더딘 줄로만 아는데, 새벽녘에 아들애랑 나누었던 대화에서 ‘그건 아니야, 그러는 거 아니야.’ 하고 말해주었던 것을 말씀이 바로 증명하실 때면 놀랍다. 다 듣고 계신다. 다 보고 계시는 것이다. 심지어 내 심중에 이른 말들까지도.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시 40:10).” 그럴 수 없는 것. 그러지 못하게 하시려고 늘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17:1).” 나는 오늘 다윗과 같이 속삭이듯 기도한다.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2).”

 

내게 맡기셨을 뿐 결코 나의 분깃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3).” 항상 보면 내 것이라 여길 때 안도하는 나쁜 습관에 대하여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막상 자동차도 팔기로 하고, 오늘 가져갈 것인데 그 서운함이 공연하다. 어떤 염려나 근심이 또 앞서기도 한다. 그럼 나중에 더 좋은 것으로 주시려니. 나는 나의 마음을 다독이며 주의 인자하심 앞에 구한다.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5).” 그러하기를 그러하여서 그러함으로 주의 기쁨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6).” 주가 응답하시겠으므로! 즉 알고 아뢰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끝까지 외면하지 않으신다. 이내 들어주신다. 곧 그 사랑을 나타내신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7).”

 

어떻게 다 아시지? 하고 놀라워할 때가 있다. 특히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묵상할 때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8-9).” 그러하심을 명백히 드러내어 알게 하신다. 신기할 정도다. 놀랍기만 하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마음까지도 주는 다 아신다.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10).” 이를 알게 하심으로 내 안에 드는 마음의 출처를 명백히 드러내신다.

 

반드시 그런 것이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25:3).” 내가 주를 바람으로 그 확신은 굳건하다. 이로써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59:9).” 주의 힘으로 내가 주를 바란다는 이 역설의 말씀 앞에 선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17:14).”

 

나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지 않게 하소서. 소유와 무소유의 간극은 주의 긍휼하심만으로 채울 수 있다는 데 놀랍다. 나의 수고도 애씀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아침에 이처럼 말씀 앞에서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충분하였다. 만족함이란 주가 내게 어떤 비밀도 없으시다는 것이다. 어제 가정예배를 드리며 같이 읽은 말씀에서 아, 하고 놀랐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이 얼마나 벅차고 기쁜 감동인지. 다른 데 마음을 두고 있을 땐 모르겠다가도 말씀 앞에 고개를 조아리면 그 뜻이 선명하여진다. 주가 이루신다. 모든 게 다 주의 손길이다. 이번에 아들애가 들어와 있는 동안 이와 같은 고백을 자주자주 해주어야겠다. 아이의 생각을 꺾으려고 하기보다 나의 삶에서 드러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하심을 보여주고 또 들려주어야겠다. 곧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 또한 내게 은총을 더하실 때 내가 더욱 주를 바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