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세아 3:1, 5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편 19:12
다들 저마다 마음속에 상자 하나씩을 숨기고 산다. 자신도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고, 남들도 그 상자를 열어보지 못할 것이라 여긴다. 실은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 자신은 안다고 알지만 앎으로 알지 못하고 산다. 그 속을 누가 알까? 하나님은 일을 숨기심으로 헤아려 그 비밀을 알게 하신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그래서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골 2:2).” 그러므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산다는 것, 그 마음을 헤아려 알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살피게 하신다. 이로써 마음의 위안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연합한다. 격려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면서 함께 주의 나라에 가는 그 날까지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여준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이를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심지어 지식이나 아내를 의지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삼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로 산다.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단지 저의 말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연마다의 무게를 같이 짊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말은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것이다. 누구냐에 따라 나도 모르게 술술 자꾸 말이 되어 나오는 경우는 그래서이다. 나는 들으며 저의 날들을 같이 느낀다. 주께 물으며 그 사연의 농밀한 은폐 또는 조작을 엿보기도 한다. 우리 마음 안의 상자에는 그래서 대체로 수치심과 이기심,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거짓 위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일은 하나님이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시려는가, 동시에 묵상하는 일이다. 아무리 그것이 사사로운 말이라 해도 저의 한숨과 고통이 서려 있기 마련이어서 이를 한껏 위장하거나 과장하거나 왜곡한다 해도,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그와 같은 사연을 내어드리는 사람들이다. 글을 쓰시라. 묵상글을 쓰시라. 나는 저이에게 권하였다. 생각으로 떠도는 마음에 언어를 하나씩 입히는 일은 마치 정리정돈을 해두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말로 듣는 일과 글로 읽는 일은 같은 내용이라 해도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왜 하나님은 말씀으로 오셨는지, 이를 기록하여 성경을 말씀으로 주셨는지.
그리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내 안에 거하시기를 바라시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제일 목적은 자기중심적인 나의 마음에 하나님 중심적인 마음으로 가득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확장하시는 일.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그것이다. 자기 안의 상자를 열어 거짓된 것들을 토해내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가는 일. 이때 말씀은 현미경이 되어 사소한 줄 알았던 아주 작은 일을 매우 정확하게 보게 하신다. 망원경이 되어 너무 멀게만 느껴지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게 하신다.
그것으로 서로를 보라고, 말이 되게 하고 글을 쓰게 하신다. 우주를 만드셨고 자연을 두셨다. 마음의 소동을 느끼게 하시고 그 변화에 민감하게 하셨다. 왜 그러실까? ‘그 기쁘신 뜻’을 위해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결국 우리로 서로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나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동생 앞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어찌 이 말씀으로 주의 예정하심을 선포할 수 있었는지 감격하곤 한다.
그러니까 그때 위암으로 죽어가는 동생을 막바지에 글방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오신 이가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나는 두 번째 목사고시를 떨어지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것도 학과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인성검사에서 떨어졌으니, 나의 부적격한 우울감과 대인기피를 두고 하나님께 정면으로 맞서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가까운 데 목사가 되려고 하는 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동생 병원으로 부른 친구도 어지간했다. 신경안정제를 잔뜩 먹고도 떨리는 마음으로 그 앞에 섰을 때, 어디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일까? 내일부터 우리 성경 공부합시다!
당장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길 일만 남은 그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호응을 하였고 느닷없이 내가 들고 선 말씀이 에베소서였다. ‘그 기쁘신 뜻대로.’ 그렇듯 어제도 또 매순간마다 누구를 마주할 때면 이와 같은 예정하심은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여기 있으나 내가 여기 있는 게 아니라 여기에 두신 이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된다. 예정하심이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다.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찬송하게 하시려고. 찬송이란 경탄이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랑이다.
이를 목적으로 창조하셨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 우연히 그저 다른 일 때문에 서로가 만나 그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본의 아니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하심이다. 주가 나를 지으셨다. 주가 저이를 만드셨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자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15:8-9).” 말을 듣다 보면 내가 얼마나 은혜인지, 우리가 얼마나 은총을 받은 자들인지.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다.
곧 서로의 화목을 위해 주께서 나를 어찌 다루셨는가. 내 모든 죄를 간과하심으로 더는 그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그 대가를 지불하게도 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마치 신앙생활을 무슨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끌려가듯 하는 경향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교회를 다니는 일도, 성경공부를 하는 일도, 누구를 놓고 기도하는 일도 죄다 억지로 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그럴 수 있는 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5).”
주의 의로우심을 나타나게 하시려고. 나의 고백은 저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저이의 고백은 저이의 미진하였던 믿음에 확신을 더한다. 그러므로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그러니까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과 찬송을 하는 일은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성화란 그처럼 서서히 나를 잠식한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0).” 아멘.
누구와 이야기를 길게 하면서 모처럼 말의 유용함과 그 몫의 내재적인 변화를 느꼈다.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좀 더 밀어붙이듯 우리가 자식을 구원할 수 없듯 누구도 저를 우상으로 삼아서는 주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언젠가 한 녀석이 거침없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들어갈 수 없는 천국이라면 나도 들어가고 싶지 않다! 참으로 멋진 어리석음이다.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는 소리다. 아니 그 자신의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누추한 것인지 자신만 모르면서 하는 소리다. 헛된 망상 같다.
감성은 종종 타락의 종이 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 나야말로 얼마나 감성적인 인간이었던가. 시를 한 줄 쓰기 위해 몸부림치며 연애라도 서슴지 않을 듯 감성적으로 치우쳐 사랑을 바라고 구하던 일. 이는 본래 죄의 종이었던 나였다. 한데 이제는 말씀을 받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
이와 같은 놀라운 기적이 내가 이룬 것이겠나? 나의 수고와 애씀의 결과가 아니다. 거저 주시는 자의 은혜였다. 것도 하필 왜 나 같은 자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라. 곧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이보다 더 놀라운 확신은 없다. 저이와 긴 시간을 대화하며 그 안의 상자를 궁금해 하다 저도 모를 그 상자 안의 수치와 환멸과 온갖 부끄러움에 대하여 내 것을 알 듯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1, 5).” 오늘 본문을 읽으며 목이 멘다. 도대체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나보다 더 음흉하고 능글맞으며 능청스럽게 위선을 떨며 살던 위인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가장 추하고 더러운 나인데, 나는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나 과자’를 하나님보다 더 즐겼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저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나를 피폐하게 만들던 삶이었다. 그럼에도 주가 나를 사랑하시니, 나는 음녀가 된 여자였다. 그럼에도 돌아와 주를 경외하며 주의 은총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이제 기도한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13).”
고의로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 모르고 짓는 죄를 용서하소서.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