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호세아 4:19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시편 20:6
사역에 대한 나의 생각은 간명하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이미 하고 있는 것.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은 마땅히 그래도 된다는 어린아이의 전폭적인 신뢰와 같고, 이미 모든 걸 하고 있는 것이라 함은 주께서 이루시고 다스리신다는 데 대한 간략하면서도 단순하고 명료한 확신이 그것이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는 이 표현을 명심한다. 죽이시던 살리시던,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이와 같은 묵상은 동기 전도사와 통화를 하고서이다. 이해가 간다. 마음이 짠하다. 밀려드는 책임감이 가중하여 어디로든 숨고 싶은,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시 55:6).” 어디 공동체 생활로 들어가 무상무념의 삶을 살고 싶기도 하는. 이제 막 삐악거리기 시작하는 두 아이와 고생하는 아내를 두고 서른 중반이 되는 사역자로서 손에 쥔 것은 없고 책임은 무거워 이를 어쩌지 못해 혼자 신음하는.
뭘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야. 나의 권면은 시들하였다. 그럼 이를 어찌 바로 알게 할까? 하나님으로 기뻐한다는 것, 이를 목적으로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에 대하여. 그러할 때 자기연민의 늪에서 헤어날 수 있고 자기 확신에 더는 눌릴 리 없다. 자기연민은 심약한 자의 교만이고 자기 확신은 튼튼한 자의 교만이다.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되지 않게 하시려고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아무 것도 자랑이 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28-31).”
내가 이만큼은 [해서, 해야] 할 것 같은 모든 오해에 대하여, 그 열심이 우리를 삼킬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애써 수고하고 그 수고가 헛되기 십상이다. 기껏 한 게 없으면서도 모든 영광의 주역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가 붙들 것은 말씀뿐이라고 여러 차례 말해주었다. 무얼 가지고 설 것인가? 누구처럼 안온한 수도원적인 생활? 어떤 안정감? 또는 만족스러움? 많은 이들의 격려와 지지? 혹은 적당함? 이것들을 추구할 때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말씀을 의지할 때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참 좋아. 하나님만 좋아. 하나님이 제일 좋아.’ 나의 고백은 단순하여서 간명하였다. 간명의 또 다른 의미는 마음에 깊이 새겨 명심함에 있다.
이를 빼앗는 게 근심이다. 뭘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의심은 주를 미덥지 않게 여겨서이다. 더욱이 주의 사역을 감당한다는 걸 마치 이 땅에서 도달해야 하는 어떤 목표치를 두고 씨름하는 일이라면, 어림없다. 수도원 생활도 그 자체가 득도하기까지 고달프다. 생의 최전방에서 운전을 하거나 주방에서 빵을 굽거나 허드렛일로 날밤 새우는 일이라 해도, 이미 고귀하여서 고결한 것은 주가 두신 자리임을 묵묵히 준행할 때이다. 무엇을 한들? 무엇으로 주의 일이라 운운하며 보람을 찾을 것인가?
나는 저이의 마음에 순종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럴 수 있는 게 말씀뿐이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주의 길을 가는 데 있어 말씀 아닌 다른 무엇을 붙들까?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하면 당신은 애들 다 키우고 아내가 든든하여, 들아 앉아 말씀이나(?) 볼 수 있어 팔자 좋은 뒷방 늙은이의 여유라고 하려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차를 팔았다. 내게 차란 다리와 같다. 처가 쪽 식구들이 모여 성탄절을 축하하며 아들애의 귀국과 그쪽 아들의 생일을 축하할 겸 모였으나, 나는 어디를 마음대로 갈 수 없어 토요일 오후 혼자 남아 있었다. 어디가 아파 파스를 붙였던 자리에 또 다시 파스를 붙이려니까 오돌토돌 피부가 성났다. 이래저래 구차하고 짜증스러워 끙, 하고 돌아누울 때 나에게는 어김없이 묵상이 되는 말씀이 있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기가 있었으니.’ 예수님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명을 거론한 비유의 인물, 나사로. 저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저는 어찌 그 구차한 생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을까? 어느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고, 헌데를 앓고 이를 개가 와서 핥는 처량하고 구차스러운 생에서, 가족들에게는 물론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도 ‘버림받은 자’로 견뎌야 했던 저의 삶은 무엇을 붙들고 있었기에 그리 간명하였나? 예수님은 이를 은유적으로 알게 하시려고 40여 번의 비유의 말씀 가운데 딱 한 번 이름을 주어 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신 것이다.
이를 어찌 하나님의 도우심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실제적인 무엇을 가지고 도우심을 저울질하고 싶어 한다. 생각했던 일이 잘 되고, 바라던 게 이루어질 때에 도우심이다. 또는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 있거나 누구의 관심과 지지로 마음이 안온할 때 이를 도우심이라 여긴다. 척박하고 곤고한 경우에는 그럼 하나님의 도우심은 소멸된 것인가? 그럼 저를 굳이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는 난센스인가? 나는 이 말을 들려주었다. 노아의 경우와 같이 거지 나사로의 경우가 내겐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어찌 저는 120년을 무모하게 나무를 해다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을 수 있었을까? 남들이 조롱하고 농담으로 들으며 경멸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스스로 이고 갔을 그 막연함과 모호함을 무엇으로 견뎠을까? 저를 의인이라 부르신 데 따른 부연이 이를 간명하게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당대에 완전한 자라.” 어떻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이것을 성경은 늘 이름 하여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저의 은혜가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은혜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 그와 같은 삶을 은혜라 할 수 있나? 하고 드는 의문이 난센스다. 그럼? 자기 일에 만족하라고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 되셔야 한단 말인가? 어디가 아프다가 기도를 하면 바로 낫는 게, 무엇이 필요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그리하여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바라는 게 가장 이상적인 믿음 생활일까? 그렇다면 굳이 믿음을 뭘 필요로 하며 살 것까지야! ‘흑백논리’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다. 흔히들 흑백논리로 무엇을 가늠할 수 없다고 하지만 성경은 극명하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6:8).”
본성은 은총을 만족할 수 없고 은총은 본성을 충족할 수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이에 본성을 따르면 쾌락의 종이 되게 돼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 만족스러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리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리 없다. 이 이율배반적인 말씀 앞에, 묵상한다. 나는 묵묵히 생각한다.
오늘 아침, 말씀을 그리 읽는다.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호 4:19).” 성령이 나를 두르시면 내가 추구하고 소중히 여기던 것들로 오히려 나는 부끄러워한다. 내가 뭘 좀 했다 싶을 때, 어디서 나를 존중하고 위한다고 여길 때,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바랄 때, 말씀은 나를 '나의 그 제물'을 부끄럽게 하신다. 저는 애써 부자의 집 대문간에 쓰러져 헌데를 앓고 있으면서도 감사한 게 아니다. 되레 아무 것도 안 했다. 그냥, 그렇게 두시는 이의 도우심을 바랐을 뿐이다.
저는 또 하루 나무를 쪼고 정을 쳐서 널판을 깔고 역청을 발랐다. 하루가 지고 다시 하루가 왔을 때 어제와 다를 바 없을 내일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거기에서 그 일을 준행하였다. 빵집에 두셨으면 빵집에서, 운전대를 잡게 하셨으면 운전을 하며, 혼자 들어앉아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그리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하는 일이 순종이었다. 즐겨 낸다는 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헌금을 드리는 게 종종 신앙의 저울이 되곤 하는 건 그 때문이다. 셈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당장 더 급히 써야 할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필요가 충분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즐겨 낸다’는 것. 사나 죽으나 내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님을 두고 나는 생각한다. 바울의 말은 너무 터무니없는 이상적인 삶인가? 예수님의 그 단 한 번의 실명 거론의 비유는 그저 단순하고 우연한 말씀 정도이었나? 물론 우리 안의 의구심은 우리를 들들 볶는다. 이게 맞나? 이 길이 맞나? 내가 이러고 있는 게 맞나? 누군 어떤데, 저는 또 이렇게도 하는데, 누가 그러던데, 하는 식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사탄은 번번이 묻는다. 이래도 계속 할래?
그럼에도 ‘즐겨 낸다!’ 이 위대한 말씀 앞에 나는 아멘이다. 살아 낸다. 견뎌 낸다. 이겨 낸다. 즐겨 낸다. 이 모두는 동의어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자의 특권이다. 돈이 있어야, 건강해야 삶에 보람을 얻는 게 아니다. 하는 일이 잘 풀리고 계획했던 대로 일이 이루어질 때만이 주의 도우심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고, 예수님은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있었으니’ 하고 운을 떼신 것이다. 저는 당대에 의인이라. 완전한 자라. 노아가 말이다. 어째서 그런가? 저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한 마디로, 그게 뭐든. 어떠하든. 뭐가 어떻든지. 주신 은혜대로 사는 게 은사다. 뿔쭐난 거 없다. 개뿔도 없다. 근엄을 떠는 게 교만이라. 스스로 만족하다고 내세우는 게 아니다. 되레 상함과 통회함으로 주 앞에 서는 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이를 확신하게 하시려고 오늘 내게 이 말씀을 주신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20:6).”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게 하시려고, 나를 지금 여기에 두셨다. 그런데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호 4:12).” 자꾸 다른 이가 뭐라 하나, 누가 내게 들려줄까, 어디 뭐 없나 하고,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13).” 이는 모두 간음함이라.
이러할 때, 말씀이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19).” 주 앞에 내려놓는다는 말, 때론 참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일 같으나 그보다 더 현명한 길은 없다. 말씀이 날 위해 비신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4).” 곧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5).”
그러니 말씀뿐이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