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3, 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편 22:26
종종 하나님을 위해 뭘 해야 한다는 오해. 저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하기 위해 참고 견디기도 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마치 수혜자로 만들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목사니까, 성도니까, 믿는 자이니까, 하는 당위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오늘 본문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무엇인가를 바로 정립하신다. 곧 주께 나아가는 것.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상한 심령 그대로, 죄로 얼룩진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꾸미거나 더할 거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좋아하신다. 종종 아내는 일일이 내가 다 해야 해! 하면서 뭐라 타박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좋아한다. 저는 우리를 살리시며 일으켜 그의 앞에서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오늘 본문은 힘주어 외친다.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3).” 힘써 주를 알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앉기를 원해 저녁에 일찍 잠이 든다. 다른 여느 책보다 하나님으로 그 삶을 살아간 이들의 글에 집중한다. 뭐든 주된 관심을 붙들게 돼 있다. 입만 열면 그런 소리다. 생각이 온통 거기에 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
꾸미고 덧대 과장하거나 확대하는 게 신앙이 아니었다.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곧 그럴 수 있는 것은,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37:4).”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가 먼저가 아니라, 주를 기뻐함으로가 먼저이다. 이는 단순히 그래야 한다는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며칠상간 정신없이 지나갔다. 늘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 나는 하는 일도 없었으나 아내는 수고가 많았다. 나야 늘 분에 넘치게 돌봄을 받고 사랑을 얻는 사람이라 하는 일도 없이 복에 겨웠다.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게 없다. 늘 보면 내가 잘난 체 할 게 없다. 거저 사는 사람 같다. 딸애는 교회 청빙을 받고 돌아오는 토요일에 첫 사역지로 간다. 흐뭇하기도 하고 다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부모님은 건재하시고 아내는 늘 유쾌하다. 아들애는 열심이고 형제들은 헌신적이다. 난 진짜 나나 잘하면 될 일이다.
모처럼 대학동기들 단체 카톡방에 끼어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참 자유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친구, 주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그 친구와 대화하느라 그리 됐다. 나의 확고한 진리는 말을 안 들으면 맞아야 한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 잘 되기만 비는 게 복은 아니다. 돌아가자. 하나님을 알자. 오늘 말씀은 저에게 두고 있는 마음이었다. 때가 되면 주가 부르실 것이다. 맞고 터져 다 깨져야 두 손을 드는 법이니까. 뭐라 한들 들을 것도 아니어서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가 크다.
나야말로 그 수혜자로 살고 있는 증인 아니던가. 성경은 결코 자기연민과 자랑을 금하신다. 그래서 나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보잘것없으나 복되어서 감사하다. 겸손하게 내 하나님과 행하는 삶.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8).”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이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일이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곧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란 무례한 것이다. 성질대로 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고 싶지 않다. 이는 사랑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 나름의 열심과 수고와 애씀이 사랑의 조건이 아닌 것이다.
오늘 호세아서는 힘써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이를 더욱 힘쓰자고 외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어김이 없는 아침과 같이, 늘 그때마다 은혜의 손길로 단비를 내려주시는 것과 같이, 모두의 고마움이 모두는 주의 은혜였다. 은혜로만 산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
왜 저들이 애완견에 또 고양이에 심취하는지. 누군 또 구두에 신발과 가방에 걸신이 들리는지. 자식에게 전념하는 일에서도. 어떤 성취나 목적에 마음을 기울이며 사는 일에서도. 그게 다 주를 아는 데 집중해야 하는 마음이 다하지 못해서이다. 정작 빈자리마다 엉뚱한 자기 기호와 애착과 터무니없는 몰두가 난무하다. 다들 그래놓고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자기연민과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자기애착이 강해 뭐라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아무리 돌아가자 한들.
종종 누구를 보다 안타까워하다 그럴 거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주를 바라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내가 나를 모르다가도 무엇에 눈이 띄고 왜 그처럼 마음을 기울이며 나도 모르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가, 하고 보면 주의 관심은 내게 향하신 거였다. 그러니까 내가 뭘 그렇게 대단한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게 아니었고 어떤 보람을 얻고자 힘겨워할 것도 아니었다. 이를 오늘 시편은 이렇게 표현한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시 22:26).”
주신 바 내게 두신 삶으로 배부른 것. 주를 찾고 바람으로 찬송이 되어 나오는 일. 바로 이와 같은 나의 마음이 영원을 사는 밑바탕을 이룬다는 것. 그래서 자꾸 누가 더 마음에 쓰이고, 그것으로 주께 기도하고 생각하고 마음을 두게 하시는 거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첫째로 오래 참는다. 다음은 온유해진다. 더는 시기하지 않는다. 자랑할 게 없다.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7).” 이걸 목적으로 수행하고 도를 닦는 게 아니라 사랑하면 저절로 이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누군 일부러 배우고 힘써 지켜 기진할 정도로 애쓰지만, 실은 그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내가 그렇구나, 하는 걸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완전한 만족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 의지로가 아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20).” 아, 내가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으니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시기를. 그럴 수 있는 바램도 내 것이 아니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 나는 온전히 주의 것으로 살기를 원하는. 그래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아, 이것이 가능한 게 아니라 마땅히 이렇게 되는 일이었다. 싫고 좋고의 문제도 아니고 바라든 바라지 않든의 문제도 아니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할 문제가 아니었다.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다. 살든지,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다. 죽든지, 죽는 것도 유익함이다. 삶과 죽음을 모두 포함하는 그리스도시다. 잘 살기 위해 주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영생을 바라기에 주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둘 다에 해당된다.
그래서 천국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셨구나. 아,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그러므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6:19).” 그래서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무엇을 재고 따져서가 아니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아이처럼 내가 주를 바라는 일.
그래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더는 누구의 지지도 또 호응도 바라지 않음으로 온전히 주만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그러셨구나.
알자. 하나님을 바로 알자. 힘써 알자. 그래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22:22).” 그리 되는 게 마땅하였다. 곧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