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전봉석 2017. 12. 31. 07:15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세아 11:10-11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4

 

 

 

요 며칠 길에 대해 묵상한다. 천성을 향해 가는 길, 순례의 길, 바로 그 인생길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온전히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나의 수고와 애씀이 그 길을 내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시대가 아니다.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 어쩌면 우린 두 갈래의 길을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길에 대해 묵상한다. 그 ‘길’을 간다는 것은 그 길을 ‘내 안에 들인다’는 소리다. 길이 든 마음은 생각보다 순탄하여서, 주의 인도하심이 ‘길을 내신다.’ 그때 그 길의 ‘길이’는 그때부터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 양을 먹이라.’ 주의 명령을 따라 기르는 삶이 된다.

 

길--> 길들여짐--> 길이--> 기르다

 

아이가 처음 사역의 길로 나가던 날, 나는 은근히 초조하여 아이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느 교단보다 보수를 표방하는 교회여서 그런가, 주일 4회 예배에 송구영신예배도 곧이곧대로 자정에나 드린단다. 주일학교 특송이 있는 새벽예배에는 전도사로서 참여해야 하고, 이는 개인적인 사정이 통하지 않는 원칙이었다. 나는 아이의 피곤한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주께 기도하면, 주님은 나도 안다, 내가 안다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프기 적당한 날씨였다. 위가 도 경련이 일까봐 진통제도 먹지 못하고 참아야 했다. 몸과 마음이 무거워 나는 뚱하였다. 큰 교회여서 뭔가 다른가? 나의 얄팍한 마음은 불편하기만 하였다. 상대적으로 나의 헐렁한 신앙생활이 면구스러웠던 모양이다. 길 위에서 길들여져 그 길이는 길거나 짧지 않다. 길이 나를 기른다.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 길 위에 선 자의 자세는 길마다 다른 것이다. 기특하게 아이는 새벽 일찍 일어나 교회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길 위에 서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우리의 길이 안 믿는 이들과 다른 것은, 사람의 길이 짐승의 길과 다른 것과 같다. 사람의 길에는 지식이 있다. 기록에 의한 말 때문이다. 말은 짐승이나 사람이나 몸으로 습득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언어를 기록하여 이를 통해 알게 되는 말이 사람의 길이어서 짐승의 길과 다르다. 짐승의 지식은 몸에 밴 유전인자의 습득으로 좋고 싫고, 유용하고 분리함을 판단하는 기준일 뿐이라면 사람은 그 이상의 가치와 기준을 위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 능력을 상실한 자들의 문화가 도처에 깔려 있는 때에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의 길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단하고 힘에 겨울 텐데도, 아이는 좋아하는 듯하여 다행이었다. 그러게. 주가 내시는 길이다. 길 위에서 길을 낸다. 주가 이루시는 데 있어 때론 어리둥절하고 의아할 때가 많지만 오늘 호세아서에서의 부르심의 길은 길 위를 난다. 날아서 오라 하신다.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11:10-11).”

 

여호와를 따를 것이다.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길 위에서는 장난이 없다. 연습도 없다. 한 번 더 해볼 수 있는 길은 없다. 떨며 오되, 그 길이 (우리에게는) 고달프지가 않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새 같이, 비둘기 같이 애굽에서,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게 하신다. 그리하여 주께서 나를 나의 집에 머물게 하실 것이다. 곧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모든 길의 끝에는 집이다. 우리가 마치 보리새우처럼 자기 집 속에 갇혀 사는 일보다 고달픈 것은 없다. 달팽이가 고역인 까닭이다. 느린 거북이의 고단함도 그래서이다. 저들이 미물에 지나지 않는 짐승들이어서 집을 이고 그러는가?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도 몇 평형을 어디에 얼마를 주고 산 집을 이고 사는 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을 대출금을 갚다 죽는 걸 보면, 그 집이 영원한 집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복이 많다.

 

아내와 둘이 나와 교회에서 오후를 보냈다. 아이엄마가 감사의 표시로 빵과 후원헌금을 들고 왔다. 옆 사무실 이모님이 고구마와 어묵국으로 간식을 내어주셨다. 같이 앉아 식사를 하던 사장 부친은 호언장담하듯 아직은 아니라며, 교회에 나가시란 말에 손사래를 쳤다. 우리 가족은 모두 감기가 와서 콧물에 두통을 호소하면서도 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길 위에 서 있었다. 걸어서 가야 할 길을 두고 왜 오늘 말씀은 새 같이, 비둘기 같이 날아서 오라 하시는 것일까? 나에게 두신 길은 수월하여서 이해가 쉽다. 내가 딛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가는 길이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내가 내 길 위에서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수고만큼 고달픈 게 또 있을까? 은혜라. 애굽에서 앗수르에서 오는 길에도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두셨다. 나는 이 말씀을 내 삶에서 체험한 바 있어 아멘이다. 끌려오고 붙잡혀 와야 하는데 돌아보면 날아서 평안히 왔다.

 

하루하루 길을 걷는 동안에도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일이다. 어거스틴의 고백에 백 번 동의한다. 주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가장 안전하였다. 주의 영광이 나의 영원한 안식처라. 그 영광 안에 있을 때에만이 내가 가장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몸이 아프다. 마음이 어렵다. 아이의 빡빡한 교회 사역에 공연히 심통도 난다. 유난들을 떠는군. 내 속에 절로 불만도 인다. 꽁하니 심보가 뒤틀리기도 한다. 나는 뚱하여 주 앞에 고한다. 그럼 주님은 괜찮다, 나도 안다, 내가 안다.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의 영광 안에 거함은 그리 고단한 일이 아니다. 아버님이 마음이 열리셔야죠. 귀와 눈이 뜨일 겁니다. 주님이 하셔야지요. 나는 저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차원에서 그리 위로하였다. 주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아직 저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3).” 곧 그 보배를 나 같은 질그릇에 두심이 그래서였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4).”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저 송구할 따름이었다. 열심을 다하는 이들의 열심이 부러우면서도 안타까운 이유였다. 열심이 저들을 삼키지 않게 하시기를.

 

주의 영광이 그처럼 내 값을 주고 얻어야 하는 길이라면, 내 힘에 겨워 딛고 서는 길이 고달픈 것이라면, 도대체 은혜에 값을 매겨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것도 또한 주의 영광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겠거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12).” 그리 행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 길을 날아서 오게도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이 영광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고달픔은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일이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 나로 여기에 세우신 이가, 우리 아이로 저 길을 가게 하시는 이가,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임을. 곧 주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 되게 하시려고.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는 내가 오늘 선택하여 그 길 위에 선 것이 아니었다.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 길은 내 안에 길을 내어 나는 주의 성령 가운데서 길들여진다. 그 길은 너무 먼 길 같으나 그 길이는 한 뼘도 아니었다. 그 긴 길이 동안에도 주는 나를 기르셨다. 길이 길들여져 길이가 짧고 길지 아니함으로 나를 기르시는 이를 찬송함이라. 모든 길의 끝에는 집이 있다. 영원한 영광이 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짧고 긴 것을 가늠할 수 없는 끝도 없는 길이의 길 위에서 우리는 안식할 것이다. 나는 종종 영원함을 묵상하다 기절할 것 같다. 그 길이의 끝을 어찌 능가하여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영원한 영광의 집이 이 길 끝에 있다. 인생길 다 하고 주의 집에 들어갈 때,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나는 딸애의 길을 축복하였다. 처음 서둘러 집을 나설 때,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기도하였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셨던 기도 위의 길이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