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전봉석 2018. 1. 12. 07:11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

아모스 6:7, 13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편 39:1

 

 

 

생각으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정적으로는 애틋하기만 하여 어떠하든지 좋을 것도 같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여, 삶이란 모진 까닭에 실제는 다른 것이다. 짊어져야 하는 게 그렇듯 호락호락하지가 않은 것이다. 호언장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보다 경솔한 것도 없다. 왜 사로잡히나? 허무한 것을 기뻐함이다. 어째서 기지개 켜는 자의 소리를 내는가? 내가 내 힘으로 뿔을 취하였다 하는 까닭이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보다 맹랑한 게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암 6:6).” 어째서 그러한가?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13).” 오늘 말씀은 우리의 오만함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신다. 그래서 다윗은 조심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말이 앞서지 않기를. 생각이 이를 주도하지 않기를.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구하기를.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하는 고백이 삶으로 드러나기를. 화있을진저 교만함에 대하여,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3-6).”

 

만만하다고 여겼던 게 고스란히 짊어져야 할 짐으로 그 무게를 더할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7).” 그래서 하나님의 보응은 이를 되돌리신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8).”

 

어찌나 잔인하신지,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9).” 다 죽어야 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몽매함을 일컫는 것이다.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12-13).” 말씀 앞에 앉아 나의 이야기로 가져올 때 그 계시는 열리고 들려 하시려던 말씀의 의중을 알게 된다.

 

내가 앞설 때 하나님은 가만히 뒤에 서신다.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 이내 올무가 되어 나를 낚아채는지도 모르고 왜 더디지, 왜 힘들기만 하지, 왜 이처럼 무겁지 하는 한탄만 이는 꼴이었으니. 개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듯이 내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언성이 높아지고 나무라듯 뭐라 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는 감정으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 외면하고 부정하던 문제는 고스란히 살면서 짊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아이의 무능하고 무책임라고 무분별한 것에 대해 야단을 쳤다. 딸애는 감정에 겨워 자신이 다 감당하겠다고 말하였다. 서로 쉬쉬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누굴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일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뜬구름 잡는 일이 아니다. 감정에 겨워 눈물을 보이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만큼 엄중한 것이다. 물러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만간 데려오라고 일렀다. 교회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다 말이 길어졌다.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닌 것에 대하여는 냉철해야 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사리에 밝으려면 현실을 직시해야 하고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려야 한다. 말로는 뭐든 할 수 있다. 감정으로는 너끈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데 이는 교만함이라. 아직 젊어서 또 좋을 때야 그처럼 부분별 할 수 있겠으나 그 애도 이제 나이가 몇인가? 우리 애도 벌써 어른이 다 되었다. 좋다는 감정만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뜨거운 가슴을 식히고 머리를 차갑게 하여 현실을 보자. 이건 또 눈물까지 죽죽 흘리고 있으니 가슴이 미어졌다. 좋다면 좋은 거다,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말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나는 모든 문제는 차치하고 과연 그 애가 얼마나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말이다. 전도사 사역을 하고 있다지만 현실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다른 일을 놓지 못하는데 그렇게 해를 거듭하면 현실이 좀 나아진다던가? 그래서 좀 나아졌다나? 우린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로 산다.

 

내 수고와 노력으로 이뤄가는 게 인생이 아니었다. 호락호락 그냥 내버려둘 수만은 없는, 나이들이 찼다. 그럼 어찌 해야 할까?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 다시 정리하면 우린 이제 영적으로 산다. 현실적으로 보면 우리야말로 뜬구름 잡는 사람들이다. 한데 우리가 볼 때 현실보다 더한 뜬구름이 또 어디 있겠나? 일례로 ‘국정농단’의 주역들이 오늘에 이른 곳을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쥐락펴락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기세등등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현실보다 더 만만했던 현실이 없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줄기를 바꿔놓을 정도의 주역들이었다. 저들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가져올 때, 그와 같이 어리석었음에 대하여 나는 은혜를 받은 자이었다. 내가 바르고 온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인가. 그래서 돌아보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

 

그렇구나.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은혜가 얼마나 은혜였는가를 뼈저리게 알게 하신다. 늘 보면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나는 누구보다 육에 속한 자이었는데 어떻게 오늘에 이르러 성령의 일을 받고 싶어 할 수 있게 되었나? 어제 하루 묵상하였던 고린도전서 1, 2장의 말씀이 고스란히 되들려지는 것 같다. 그러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 딸애가 눈물을 흘리는데도 나는 냉정하여야 해서 가슴이 아팠다.

 

고1 올라가는 아이가 그래도 인문계가 되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그만 온다고 할 줄 알았는데 멀리 보고, 토요일에라도 올 것이라고 말하여 것도 기특하였다. 두 초등학교 아이들이 갈 데가 없어 글방을 기웃거렸다. 들어와 책을 읽게 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고 간식을 내어주었다. 한 아이는 엄마가 두 오빠 동계훈련에 따라가서 며칠째 집을 비우고 있고, 한 아이는 엄마가 미장원을 하여 매일 9시나 돼야 끝나서, 이를 기다리는 게 둘 다 고역이었다. 그러니 어쩐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가르치겠나.’

 

나의 마음에 평안을 허락하시고 좋고 좋은 마음을 허락해주시던가, 아니면 헤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딸애 일은 우선 그렇게 매듭지었다. 교회 사역에 따른 어려움은 일단 솔직히 담임 목사에게 말씀드리고, 하나님이 어찌 이끄시나 보자고 하였다. 떠돌 듯 배회하는 아이들은 갈 데 없으면 글방에 오라고 하였는데, 그리 마음을 주시는 데야 성가신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에게 주의 마음을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할 때 더는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는다. 처한 상황에 함몰되지 않는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 날마다 사역이었구나. 어느 특정한 날이 있는 게 아니었다. 아내와 둘이 딸애 오기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다. 늘 걱정과 근심이 앞서지만, 또한 지독하게 잔인하여 냉혹하기까지 한 현실이지만,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오직 주만 바람이라.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2).”

 

뭐라 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었다. 누구에게 마음이 기울게 하시는 이도 말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3-4).” 주만 바란다는 것만큼 현실적이고 매우 실제적인 일이 어디 있을까? 때로는 싸움이고 내 안의 끊임없는 다툼이어서, 나는 애들이 뿔쭐나게 드나드는 게 싫다. 누구 일을 짊어지는 것도 싫고 어떤 일에 마음 쓰는 것도 싫다. 싫고 싫어서 외면하지만 이내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신다.

 

그리하여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5).” 그렇지. 내가 내 힘으로 설 수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오늘 본문 아모스서도 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겠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7).” 깨져봐야 안다. 그렇지 않고는,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13).”

 

아,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부디 우리의 미련함이여!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