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전봉석 2018. 1. 14. 06:4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8:11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편 41:12

 

 

 

함박눈이 내렸다. 날은 푸근하였다. 어린아이처럼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글방 안은 고요하였다. 딸애가 어찌 말을 잘하려나, 생각이 여러 갈래였다. 잘 참아내고 더 해보았으면 하는 마음과 어렵고 힘들면 그만둬야지, 하는 마음이 겹쳐 나도 잘 모르겠다. 도라지조청을 뜨거운 물에 풀어 홀짝거렸다. 오전 내내 실내가 어두웠다. 장판에 온도를 올리고 소파에 누워 허리를 지졌다. 새해 들어 다시 읽기 시작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영광을 바라보라>를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종종 엉뚱한 것들이 두렵다. 내가 내 육신의 고통을 잘 이겨내지 못할까봐. 부모님이 혹은 늙으신 장모가 나보다 먼저 죽을까봐. 아내 없이 살아야 할 날이 올까봐. 더는 운신도 못해 거적때기 위에 누워서나 지낼까봐. 엉뚱하여서 너무 뚜렷한 무서움이다. 사는 날 동안 정말이지 말씀으로 잘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내가 즐겨 읽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정말 저들의 글이 이끄는 것처럼 살다 갈 수 있을까? 나는 아무 것도 자신할 수 없어 두렵다. 그래서 나는 당연한 것들이 언제나 앞서 무섭다.

 

점심때가 되어 아내가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왔다. 같이 <1987> 영화를 보러 갈 거였다. 모처럼 둘이 눈길을 걷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딸애는 이내 그만두고 나왔다며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잘 했다, 괜찮다, 위로하며 같이 기다렸다가 해물우동을 사주었다. 영화는 보지 않기로 했다. 목사님은 뭐라는지, 그래서 교회는 어찌 잘 하고 왔는지, 아내와 둘이 말이 많았다. 나는 이상하게 좋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했고, 불편하면서도 잘 됐다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노구(老軀)를 이끌고 장모가 오고 있다며 전화를 주었다. 딸애는 들어가 쉬고 아내와 둘이 교회로 갔다.

 

평생을 그리 산 것. 나는 동대문 집을 그만 내려놓고 노년의 삶이 말씀으로만 집중하였으면 하였지만, 둘은 늘 나누는 이야기가 낡은 집에 세 들어 사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돈과 그 돈으로 다시 집을 보수하는 이야기와 지난 날 누구 이야기와 또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면서, 두어 시간을 그렇게. 나는 돌아앉아 책을 읽었다. 저녁으로 도가니탕을 사드렸다. 맞은 편에 앉은, 노인을 마중 나온 죽음 꽃이 얼굴 곳곳에 더욱 선명하였다. 둘은 여전히 또 그런 이야기였다.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그 집을 좀 청산하고 이제 남은 생애가 주와 주의 나라에만 집중하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생을 해온 일이라, 형님도 그렇고 그리 하실 수 있는 날까지 하게 해드리는 게 낫겠다고 했단다. 더는 뭐라 해서 될 소리도 아니어서, 나는 나 혼자 무서웠다. 그저 사느라 사는 데 따른 소비가 때론 너무 허비라서 말이다. 딸애의 일도 장모의 일도 생각이 여러 갈래라 나는 그 갈피를 잡지 못해 떠도는 마음으로 어쩌지 못하였다.

 

오늘 아침, 그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나는 그렇게  열심으로유난을 떠는 사람이 아니다. 그나마 경건도 보잘것없어 어디에 내놓을 것도 없는지라, 다만 우리의 주림과 갈함이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니. 그 고통이 어떠할까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전에는 가져본 적 없는 새로운 두려움이다.

 

더는 말씀을 듣지 못할까봐. 이를 의지하고 바라는 마음이 쇠할까봐. 이것으로는 아무런 의지가 되지 않을까봐. 이렇듯 가져본 적 없는 마음이 종종 무섭다. 아, 그래서 예수님은 그처럼 냉정하게 말씀하신 것이었구나!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면, 차라리 잘라버려라. 불구로 살아라. 불편함이 낫다. 말씀을 의뢰하고 바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내와 장모 둘은 두 시간 내내 세 들어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누가 얼마를 입급 했나, 얼마 밀렸나, 계약은 언제까진가, 하는 따위의 말들. 저쪽 일가(一家) 중 누가 이혼을 하고 얼마를 받았네, 그 건물은 얼마고. 일가 중에 탤런트 누가 TV에 나왔다는데 걔는 그 돈을 어떻게 벌었다느니, 그쪽 일가 중 누가 원래는 얼마를 줘야 하는 것이 있었다는 둥. 이어지는 말들이 전부 그래서 돈이었다. 돈돈거리는 세상에서 돌아버린 사람들의 돈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돈이 없어 기갈이 아니었다.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영영 불가능한가? 아, 그래서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이셨구나.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11:26).” 그럼 그렇다고 나는 말씀을 잘 알고 이해한다 할 수 있나? 어림없는 소리. 말씀은 늘 나의 영혼을 허기지게 만든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

 

이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그 오묘한 맛을 알면,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노년에 이제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서까지 셈을 하고 누구에게 얼마, 또 얼마를 계산하고 있는 장모의 얼굴에 유난히 검버섯이 도드라져 나는 무서웠다. 어머니 이제 그만 그 집은 처분하시고, 좀 손해를 보더라도 줄 거 주고 물러나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참다못해 한 말을 거들었다.

 

졸지에 철딱서니 없는 소리가 되었지만, 지금 그 집을 팔면 이쪽 일가 저쪽 일가 지분거리며 얼마라도 뜯어갈려고 하는 이들이 많아 오히려 손해라나. 돌아오면서 아내에게라도 한 마디 더 하려던 것인데, 뭘 모르는 소리로 치부되어버려 더는 말한들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살아서 사는 날 동안 제 팔에 뺨맞고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따름이라.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계산에 능한 영혼으로는 어렵다. 셈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노구를 지척거리며 장모가 전철역 저 안쪽으로 들어설 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철렁한다. 왠지 자꾸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말이다. 사람이 어찌 이 일에 관여할 수 있겠나. 나야말로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단 한 시도 더는 살 수가 없음을 고백한다. 익숙한 것을 놓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회개는 결국 그 모든 게,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걸 주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내가 없어도 좋으나 주 없이는 살 수가 없음을, 어린아이처럼 고백하는 일이다. ‘하늘만큼 땅만큼 엄마가 제일 좋아’ 하는 아이처럼.

 

그래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얼마큼 진실한 고백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제 그랬으면 좋겠다. 이 복음이 ‘하늘만큼 땅만큼’ 심지어 나보다 더 좋다. 아니, 이게 아니면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를 인정하는 삶이란 나머지 모든 게 무가치하다는 고백이다. 동대문 집이 뭐 그리 대수인가? 누구누구네 하며 열거되는 난다 긴다 하는 일가의 성공담은 그저 돈이다.

 

기승전, 돈이다. 이혼을 했네, 하면 돈은 얼마나. 어디 취직을 했네, 하니 돈은 얼마나. 온통 귀결되는 돈에 대해 돌아버릴 지경이 된 한 일가를 안다. 아내의 사촌으로 내겐 손위 형님뻘이었다. 저이가 본래는 빈털터리라. 딸, 아들 낳고 나름은 모 유명브랜드 여성 의류 홍보실에 근무하던 이로 새벽엔 우유 배달을 하고 퇴근 후엔 과외를 뛰던, 나름은 성실하였던 이로 기억된다. 부천 어디 철도 옆에 빌라를 제 명의로 사서 집들이를 했던 것도 같다. 대출이 반 이상이라 제 것이라 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어릴 때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친 저의 모친이 사별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저들 세 형제에게 각각 얼마씩의 돈을 나눠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이가 갑자기 졸부가 된 거라. 중동 쪽에 40평형 아파트로 이사를 하네, 상동 쪽에 패밀리레스토랑을 두 개 오픈 했네, 어쩌고 할 때는 이미 내가 저를 멀리하고 있을 때였다. 왜냐하면 사람이 말투부터 달라져서 언제부터 전서방이라 부르더니 야, 자로 통일했는지 말끝마다 반말이라. 아니꼽고 더러워서 나는 아예 발길을 끊은 상태였는데, 그처럼 거들먹거리던 세월이 고작 10년이라.

 

하나둘 빚에 눌리더니 급기야 다 털어먹고 두 자식들은 떠나고 아내로부터도 이혼을 당해 지금은 어디 고물상에서 빈 몸뚱이로 얹혀산다고 하니. 그 집 세 형제가 어찌 된 일인가 모두 신용불량자가 된 거라. 일본인과 결혼했다 사별하고 돌아온 모친으로부터 얼마씩을 받았는가 모르겠으나, 각각 탕진하여 그 꼴이 말이 아닌 것이라. 장모와 아내가 둘이 앉아 저들 이야기를 하는데, 엿듣듯 하던 나는 간담이 서늘하였다. 괜히 통쾌한 것 같다가도 안 됐고, 싸다 싸 하고 오장육부가 다 시원하다가도 불쌍하였다.

 

그러니 참. 말씀 없이 하나님 모르고 산다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가.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을 정도의 스토리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띵, 하였다. 정신 차려야지 남 얘기가 아니라. 것도 이 땅에서의 삶이 그 모양으로 쫄딱 망하는 것보다 영생을 허비하고 잃어 더는 천국을 바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겠으니.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시 41:12).” 나는 오늘 말씀을 붙든다. 주께서 나는 붙드실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실 것이다. 이 의미를 안다면 동대문 집이 대수이겠나? 팔 다리 한 짝이 문제이겠나?

 

아모스 선지자가 소리치는 것 같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암 8:4).” 두렵고 떨림으로 듣는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5-6).” 그러니 죽기직전까지 ‘해오던 걸’ 놓지 못하고 사는 게 인생이라면, 말씀만 붙들자. 복음으로만 살자. 주의 인도하심만 바라자.

 

온통 머리속에 셈하는 게 누구에게 얼마를 받고 또 얼마를 물고,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밀을 내고 에바와 세겔을 늘이거나 줄여 이익을 볼까, 하는. 전에 나의 선생이 말하길 돈은 내가 버는 게 아니라 돈이 벌려서 내게 오게 해야 한다고, 그러자면 사람을 써야지 돈을 쓰는 게 아니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고 찌꺼기로 밀을 팔자, 하는 식으로. 나는 이제 안 부럽다. 내겐 동대문 집도 없고, 누구처럼 몸뚱이 하나 믿고 어디에 의탁하지 않고 살아도 될 처지도 못되고, 궁리가 용해 이문을 잘 내는 감각은 없다 해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나의 남은 생애가 부디 그러하기를. 곧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시 41:12).”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