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 4:10-11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47:7
그럼에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그래서 니느웨를 구원하심이 단지 니느웨만을 위한 게 아니었겠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온 땅의 왕이심이라.’ 고작 나는 ‘하룻밤에 낳다가 말라버린 박넝쿨도 아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넓고 크신 은혜에 비할까. 어찌나 나는 요 나만 생각하고 바라는지 모르겠다. 모든 영혼은 다 주께 속하였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말씀 앞에 앉아 생각이 많아진다. 나를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라면 단 한 시도 살 수가 없는 것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그래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이 가장 고상하였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취할 수 있는 원리겠다.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터라 하루가 종일 헐렁하였다. 아이가 각각 시간을 달리하여 다녀갔고, 이웃하고 있는 이 둘이 와서 잠깐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적당히 느슨한 하루였다.
저의 처가 젊을 때 정신과 치료를 받았었다는 것과 심지어 입원을 하여 오랜 시간 상담을 받았어야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게 들려주는 저의 말이 기도를 부탁하는 소리로 들렸다. 모든 선택에는 짊어지고 가야 할 제 몫의 등짐을 져야 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그것으로 생을 다하기까지 갚아야 하는 값을 물기도 하는 것이다. 새벽 일찍 문자가 들어와 깜짝 놀랐다. 진지하게 서로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서로가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는 주의 긍휼하심만이 필요하겠다는 소리였다.
누가 왜 저런 말을 또는 그와 같은 근황을 말해주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때로는 딱히 조언을 구하고자 하는 게 아니어서 저는 말하고 자기 말에서 자신의 답을 찾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뿐, 아무리 옳다 해도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것보다 나을 때도 있다. 왜냐하면 저의 구구한 설명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것이어서 제풀에 볶여 말을 하는 것이겠으니, 일일이 그걸 지적하거나 어떤 정답을 줘야 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되레 그것이 원망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렇듯 글로 옮겨두는 까닭은 누가 어떻다는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셨는가 하는 점이다. 요나서는 그런 의미다. 니느웨가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의 ‘나와 하나님’의 이야기로 읽힌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0-11).”
나는 그럼 어떻게 구원을 받았나? 내가 한 수고는 무엇이고 어떤 애씀을 통해 얻은 것이던가? 수고도 아니 하고 재배도 아니 하였다. 나를 여기에 놓아두신 것은 주의 은혜라. 그것으로만 전부다. 만유의 주, 온 땅의 왕이신 주님.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히 2:8).” 그 주님이 다 하신다. 내가 저 사람의 어떤 이야기를 듣고 무얼 꼭 해야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다만,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시 47:7).” 찬송할 따름이다. 주가 어찌 이루어가시든 신뢰함이 전부였다. 왜 저가 자신의 처 이야기를 하며 구구한 삶의 고단함을 털어놓고 있는지, 아침 일찍 뜬금없이 저녁에 서로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화해의 물꼬를 텄다는 문자를 주었는지, 이 아이와 저 아이가 왜 글방으로 오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꼭 일일이 알 필요는 없는 거였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심을. 저의 아내가 젊은 날 그 좋았던 믿음의 가정에서 배우고 자란 신앙의 기준을 저버리고 안 믿는 남자를 선택하여 한평생을 짊어지고 사는 광야의 무게에 눌려 신경쇠약에 걸리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것을 짐작하였다. 저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믿음의 눈으로 저의 아내가 살아왔을 고단한 무게를 생각하였다. 여전하여서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보편적인 기운 정도로나 이해하고 마는 완고함으로, 그의 자식도 저의 영향에서 놓여나질 못하는 것이었으니.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기 싫은 게 아니라 그게 안 되는 의지와 이를 돋우어주는 부모의 신앙이 없으므로 안타까운 것이다. 주일에 와, 하고 말하면 아이는 늘 네, 하고 대답한다. 싫지는 않다. 다만 토요일 밤에 오락을 하는 것과 그러므로 늦게까지 깨어있다 새벽에나 자니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과 이를 그냥 내버려두는 안 믿는 부모의 방기가 또한 한몫을 한다. 알지를 못하니까 아무리 보여줘도 그게 뭔지 분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애나 부모나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의 몸서리쳐지는 '오래된 습관'에 대하여.
이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사람과 같이 되어 이 땅에 오시기까지 하신 주의 긍휼하심 앞에서도 속수무책이라. 이를 어찌 알게 할까? 믿음 좋은 아내를 너스레떨 듯 자신이 허용하는 것처럼 구는 저 철딱서니 없는 노인네를 어쩌면 좋을까? 뭐라 한들. 주의 은총이 아니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이어서 나는 가만히 저의 말을 들으면서 주를 바라고 구하는 것이다.
이번 주 논제는 ‘오래된 습관’이었다. 한 아이가 길에 침을 뱉는 습관이 생겼다. 엄마는 이를 나무라고 꾸짖어도 고쳐지지 않자, 아이를 데리고 뒤뜰로 갔다. 그리고 금방 심은 나무를 한 그루 뽑아보게 했다. 나무는 금세 뽑혔다. 다음은 일 년 전에 심은 나무를 뽑아보게 하였다. 조금 힘이 들었지만 그 나무 역시 어렵지 않게 뽑혔다. 다음은 십년 된 나무를 뽑아보게 하였다. 아이는 제아무리 힘을 써도 뽑히지 않자, 그제야 엄마는 아이에게 일렀다. 습관이란 오래 되면 오래될수록 뽑아버리기 어렵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나쁜 습관을 찾아보게 하고 아울러 좋은 습관도 무엇인지 말하게 하였다. 이를 글로 써보면 생각보다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다 알고 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게 습관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주장하려드는 게 습관이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 몸에 밴 대로 산다. 이를 일러 단번에 고쳐질 수 있는 게 습관은 아니다. 아이도 안다. 절규한다. 그럼에도 게임에 빠지고 스마트폰에 열중한다.
주가 붙들어주지 않으시면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내가 누구의 말을 듣고 저를 상대하기보다 주를 바라는 쪽을 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른 말을 해준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되레 그러고 나면 고마워하기보다 원망이 날아온다. 푸념이 내게 쏟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섣불리 말해주기보다 나는 이제 저가 말할 때 주를 생각한다. 주가 만지시길, 다루시길, 붙잡아주시길, 그러면서 나는 듣는다.
자칫 내가 누구의 말에 또는 그 반응에 성내는 까닭도 앞서 기대하는 성과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 4:4).” 주가 내게 물으시는 것 같다. 한 영혼이 주 앞에 나오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아이도, 저도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 있었으니,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 47:1).” 주를 바랄 뿐이라.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6).” 그래서 나는 이제 누가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할 때, 아이가 글을 쓰든 안 쓰든, 책을 읽든 안 읽든, 주일에 나오든 못 나오든, 나를 여기에 두시고 이곳으로 오게 하시는 이를 두고 내가 어떻게 하려고 하는 마음을 자꾸 금지한다. 바라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내가 죽겠어서, 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주를 생각하는 것이다. 저가 저의 아내를 두고 얘기할 때도 나는 그래서 주의 뜻을 바랐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7).”
그러라고 나를 괴롭게도 하신다. ‘네가 성내는 게 옳으냐?’ 내게 물으시는 주님께 나는 함구한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다. '만 입이 내게 있어도 그 입 다 가지고' 내가 무얼 변명할 것인가.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25:7).” 하루 하루를 사는 동안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