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5:2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편 52:8
날은 너무 차고 하늘은 찢어질 듯 청명하였다. 글방 안에는 햇살이 가득하여 다른 세상이었다. 하루는 정말 잘도 간다. 성큼성큼 거침이 없다. 뭘 하든, 어떠하든, 벌써 또 수요일을 지나고 후반부에 이르렀다. 이틀째 우려낸 보이차 맛이 깊었다. 아이들 수업을 하고 책을 읽고 혼자 서성거리는 날은 다를 게 없었다. 뜬금없이 마음 심(心)자를 놓고 그 의미를 여러 갈래로 생각하였다. ‘심장에 있는 마음은 정(精)이고, 머리에 있는 마음은 지(智)이고, 배에 있는 마음은 의(意)이다.’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는 것이 정서(精書)이다. 생각으로 이를 다스리며 통찰하는 것이 지각(知覺)이고, 가치를 끌어안는 일이 의미(意味)다. 예로부터 마음에는 신(神)이 깃든다고 하여 신명(神明)나는 일을 갈구하였다. 마음의 기분이 심기(心氣)이고, 마음에 작용하는 것이 심령(心靈)이며, 그 유익을 구하는 게 심식(心識)이고, 이에 바른 마음이 심신(心神)이다. 이를 주장하는 것이 심장(心臟)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는 법이 없다하여 심외무법(心外無法)이라 한다.
예전에 놓고 보던 책을 펼쳐, 하필이면 마음 부분을 다시 읽으며 그 의미를 살폈다. 딸애가 근무하는 곳에 누가 비트코인으로 백억을 벌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실제 그 금액이 너무 황당하여서 가늠할 길이 없으나, 분에 넘치게 들어오면 그 의미는 사라지게 되는 법이다. 통계적으로도 보면 그렇게 얻은 만족함은 사람을 더욱 타락하게 하여 급기야 없는 것만 못한 결과를 낳는다. 아, 성경은 그래서 궁극의 이치를 말씀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예수님도 이를 인용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셨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28).” 그러므로 우선순위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 마음이란 본래 주체할 길이 없는 것이어서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심신心神) 우리의 삶은 신명(神明)난다.
신명난다는 것은 저절로 흥겨운 마음이고 멋이다. 하나님으로 밝은 마음이어서 말이다. 누구와 대화를 하면 반 이상이 돈으로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게 요물이라. 사람을 가지고 논다. 온통 세상이 돈돈거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다. 시편 73편은 그럴 때면 깊은 성찰을 가져온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저들을 부러워했다가는 영락없이 그리 된다.
그럴 때면 나름 한다고 한 것들이 모두 헛되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16).” 아내는 한 푼이라도 더 아껴보려고 궁리하지만, 내 보험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잔소리를 해댔다. 아프면 병원엘 가라는 것이고 그걸 위해 보험을 드는 것인데, 안 그럴 거면 깨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면서. 그러니 이 정도로 병원을 들락거리면 한도 끝도 없다며, 나 또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것이다.
지지리 궁상이라. 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들 이게 헛되다. 잘 되는 놈은 뭘 해도 술술 잘 되는 것 같으니까, 이를 생각한즉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이럴 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마음을 기울여 지혜롭게 생각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머리로 마음을 두는 일을 지각(知覺)이라 한다면, 그 깨달음은 마음두기에 달렸다.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그럼 그 생각을 용이하게 하는 것은 미루고 더디 해야 할 것을 분명히 아는 일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듣는 것이 마음에 깃드는 일이 의미(意味)있다. 마음의 분별이 심식(心識)이다. ‘인식하고 식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를 그러니 어쩌면 좋은가? 전날에 읽은 하박국서에서 그 답을 찾았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13).” 주를 알고 주 앞에 내려놓는 일이다. 나는 의문한다.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12).”
그런데 어찌 잠잠하시나이까? 살면서 드는 이와 같은 마음이 나를 어렵게 한다. 그럴 때 성경의 지도는 일관성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 나는 주의 백성이라는 것.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
이를 절절하게 되뇐다.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렘 7:23).” 주의 말씀을 들으라. ‘그리하면’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저의 백성이 된다. 말씀을 따라 이 길을 걸어가라. 복이 거기에 있다.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11:4).”
누구는 비트코인으로 백억을 벌었다고 하지만, 나는 말씀을 붙들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4:7).” 나는 주의 백성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30:22).” 이 확실한 말씀 앞에서 다른 걸 부러워 할 건 없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질투하면 미끄러진다. 하나님은 결국 선하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마음이야 저 혼자 들썽거리는 것이어서, 누가 어떻다 하면 벌써 마음이 혼자 널을 뛰지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이가 오늘의 나를 모른 채 방치하실 리 없다. 내 안에 이는 마음의 요동으로 묻다, 물음을 그치고 기도하는 일. 기도하다 보면 믿음으로 기다림도 가능하여져서, 이런저런 문제를 주께 맡김으로 가뿐해진다.
내가 짊어지려고 해서는 어림도 없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나는 마음을 지켜야 한다. 곧 이와 같은 말씀을 마음에 품는 일이 값진 것인데, 품을 회(懷)자를 살펴보니 그게 또 기가 막히다. 곧 마음을 옷 속에 품는 일이다. 그럴 때 유쾌한데, 유쾌할 쾌(快)자가 마음을 결단한다는 의미다. 곧 그 마음이 흐르는 길이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게 말로써 어디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그럴 수 있는 비결이 있었으니, 기도와 간구다. 나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각이 뛰어나시다. 우리도 마음을 머리로 두면 지각(知覺)이 생겨난다. 이때 그 앎은 감사할 수 있게 하고, 그럼 ‘하나님의 평강’ 곧 신명(神明)이 내 안에 듣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명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그래서 유쾌(愉快)하다는 것은 마음이 상쾌한 일이다. 마음이 흐르는 길을 보여준다.
오늘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하찮음이 존귀함으로 일컬어지는 바를 보여주신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그럴 수 있는 까닭은 ‘그곳’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기 때문이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6).”
세상에서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듯하나, 나의 약함이 강하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런저런 게 나를 괴롭게 할 때도 있으나, 나의 여러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오히려 내가 강하여져서 주를 모른다 할까 두렵다.
내게서, 나의 약한 데서 나올 것이,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었다. 곧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내가 이처럼 의지하고 바랄 수 있는 게 복이었다. 돈이 좀 여유가 있었다면, 생활의 지경이 좀 널찍하였다면, 건강하고 유능하여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생이었다면, 과연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간절함으로 주를 바랄 수 있었을까? 어떠하든, 그러나,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의지한다.
도엑과 같이 당장은 저의 유익으로 모든 게 잘 되는 것 같으나,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1).” 알면 알수록 지금의 나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의 은총을 사랑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