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18. 1. 29. 07:07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나훔 2: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시편 56:10

 

 

 

내가 믿는 자를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이 말씀이 내내 마음을 울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마는 또는 왜 그러고 있냐고 되묻는 것 같은 이에게 대답할 말이 되었다. 오랜만에 누굴 만나고 또 아이가 오고, 다들 여전하여서 그게 속상하였더니, 내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다.

 

다들 명석하여서 제몫을 다하고 어엿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왜 내 마음은 뿌듯하지가 않는 것일까? 채근하듯 믿음 생활을 권하고 믿는 사람답게 살자고 말해보지만, 내 말이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올 때, 어떻게 말씀은 나로 하여금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를 채우신다. 나의 모든 걸 의탁함으로 그날까지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아는 것이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삼상 2:9).”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다. 들려줘야 할 게 많았다. 그런데 저의 표정에서는 또 아무런 변화가 이는 것 같지가 않아 막연하여서, 조바심은 나 혼자의 몫이라 애써 누르고 달랬다. 큰 아이에게 점심을 사달라고 해서 같이 내려가 먹었다. 어디 펀드를 들고 있다는, 비트코인을 후발주자로 해볼까 한다는, 사귀는 아이가 은행에 있고 하니까 뭐라 한들. 백날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는가, 혼자 애면글면하였다. 공연히 밥을 사라고 했나, 싶어 내내 얹힌 마음도 들었다.

 

나는 부끄러웠고, 압도당했으며, 낙담이 일었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망연자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도대체 말씀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도 내가 내 의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깊이 깨달았다. 그럼에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다시 붙들게 되는 게 말씀이었다. 어쩔 것인가? 다른 수가 없었다.

 

딸애는 주일학교 아이들과 놀아주고, 놀아주는 것으로 그칠 게 아니라 거기에 맞는 주일학교 공과를 사자고 하였다. 그렇듯 안 믿는 가정에서 제 발로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기적이겠으나, 우린 우리대로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말하였다. 억지로야 어디 되는 일이던가. 나나 너나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는 사람일 뿐인데, 내가 받은 은혜가 크고 좋으니까 그걸 알려주고 말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누구 때문에 또 아이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게 더하신 주의 은혜로써 마땅한 것이어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감당해야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내가 당하는 일 같으나,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또 불안이 초조가 나를 엄습하여, 나는 누구를 배웅할 때마다 울컥한다. 어깨를 툭툭, 치다 또 손을 흔들고 돌아서면 그냥 엉엉거리며 울어버리고 싶은. 어떤,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무얼 붙들어야 할까? 괜히 아이에게 밥값을 내게 했나봐, 하면서 몇 번씩 아내에게 조바심을 부렸더니 아내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만다. 나는 부끄럽고 압도당하며 낙담하고 절망 가운데 있고 망연자실 포기하고 싶다. 문득 돌아서다 이렇게 드는 마음이 또한 희한하였다.

 

그럴 거 뭐 있나? 오면 다행이고 안 오면 그만이고, 펀드를 하든 비트코인에 빼앗기든, 주일성수를 하든 말든 내가 왜 이처럼 속이 볶여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거였다. 내가 목사라는 게 말이다. 아무 것도 거드는 게 없는 삶인 줄 알았는데, 내가 그런 것으로 힘들어하고 안타까워하고 안달을 하고 있었으니, 대체 내가 왜 저 아이의 ‘그런 면’으로 낙담하고 절망하고 부끄러워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 복음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게 할 수 있게 하는지.

 

내가 저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나 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아이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 말이다. 함께 지켜야 하는데, 같이 파수하며 허리를 견고히 묶어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까? 싶은 조바심 뒤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10).” 하는 말씀으로 위로를 삼고 새 힘을 얻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알면서도 늘 내가 낙담하고 실의에 젖어 허탈함으로 또는 공허함으로 몸서리치는 게 마땅하였다. 저 아이는 모르니까, 저가 모르니까 저러는 것이어서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 알게 할까? 나는 속상하다. 이내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걸 알면 알수록 주만 바라고 주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어서. 안 보면 차라리 속은 편한데, 보고 나면 이처럼 끌탕을 지긴다.

 

그럼에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하나마나 한 소리가 아닌 것을 잘 안다. 듣는 둥 마는 둥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도, 내가 확신하는 것은 ‘여기까지 온 게 어딘가?’ 안 믿는 가족들은 다들 늘어져 자고 있을 시각에 혼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온 아이들이나, 멀리 산본에서 와서 또 돌아가 서울로 가야 할 거면서도 ‘여기까지 오게 하신 이’가 있을 거였다.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기를 기도한다. 펀드가 됐든 일확천금을 노리는 ‘비트코인’이 됐든, 나는 그것으로 잘 되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데 마음 쓰고 관심을 기울여 주를 멀리하고 안 믿는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사는 삶에 대하여 염려한다. 어디서든, 뭘 하든, 너는 믿는 사람이란 걸 늘 명심해. 안 믿는 친구들이야 그렇다 쳐도, 우린 뭔가 다른 사람들이어야지. 곁에 앉아 아이를 두고 하는 말에 그저 고개만 끄떡거리고 마는데도. 어쩌겠나? 나는 그렇게 말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인데.

 

지난 주일에 같이 동해로 놀러갔던 아이들이 다 글방 아이들이어서, 누구누구 소식을 듣다 그리 잔소리처럼 이를 수밖에 없었다. 중1 때 만나 같이 팀을 이뤄 3, 4년 같이 수업을 했고. 그러는 동안 부모들도 친해져 다들 유대관계가 좋은 것이어서.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아이에게 네가 저들과 다름에 대하여 바로 알기를 바랐다. 다섯 아이 가운데 이 한 아이만 글방에서 교회로 들어오고 오늘까지 함께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다들 뭘 하고 사는지, 직장은 어딘지, 누가 내 이야기를 하더라는 소리에 같이 보자고 말하면서.

 

서로 다른 다름을 바로 알지 못할 때 우린 휩쓸려가기 십상이다. 아직도, 여기까지 오는 이 애가 저 애들에겐 신기할 것이겠으나. 나는 자꾸 저 아이들 소식을 들으면서도 이 아이만 중요할 뿐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11).”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사회생활을 안 하니까 이러는 것이라 하면 더더욱 할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러자니 같이 어울려야 하고 그 관계를 이어가야 하고 그 가운데서 사는 즐거움을 찾는 일이었으니, 뭐라 한들.

 

그럼에도 아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우리는 믿는 사람인 것을 명심해야 해. 하고 말해줄 때의 나의 말이 얼마나 가소롭기나 했을까. 그저 그러려니 하는 소리로나 듣고 말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이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며 또한 다독이며 권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1).” 감히 비교하자면 그런 심정이었다. 마음이 헛헛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좀 더 능력이 있고 뭔가를 좀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늘 빌빌거리는 사람이 자꾸 그런 소릴 하니.

 

공연히 나로 인하여 하나님을 우습게 여길까,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주를 의지하는 수밖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10).” 다른 더 좋은 수를 나는 모르겠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11).” 새로운 날 아침, 아이를 생각하다 울컥하는 심정으로 주의 말씀을 되뇐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