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전봉석 2018. 1. 30. 06:54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나훔 3: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느슨한 월요일, 폴 투르니에의 <대화>를 읽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복음>을 읽었다. 특히 올해는 다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들을 읽는 것으로 독서 계획을 세운 셈이 되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하늘은 쨍하니 파랗고 창가에 듣는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따뜻하였다. 누구는 무슨 일로 바쁜데 어쩌다 입만 열면 그 얘기부터 한다. 누구는 무엇에 관심이 많은데 늘 보면 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 누구는 오래 된 습관을 버리지 못해 아무 생각 없이 그 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누구는 한사코 누굴 찾아서 어울린다.

 

누구든 다 자기 지론(持論)이 있어 늘 지니고 살거나 굳게 내세워 그 견해를 꺾지 않는다. 나는 헐렁하여서 복이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 듣고 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그것이 어떤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그 일에 분주하여 주를 바라는 데 소홀해지는 것이면.

 

아무리 좋고 좋아서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 해도, 보람되고 의욕이 넘쳐 입만 열면, 눈만 뜨면, 누구와 만나기만 하면, 혼자 있을 때도 그 일에 정신이 팔려 주를 원하는 데 있어 그럴 마음이 없어지면.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에서 주를 빙자하여, 경건의 유익을 탐하는 자리에 들게 되는 일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

 

차라리 장애인으로 살아라. 네 지식이 너를 주도하려 들면, 네 능력이, 학식이, 인맥이, 타고난 열심이, 수고가, 애씀이, 늘 바쁘게 몰아치게 하여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그 범죄란 참으로 모순된 자기 지론과 같아서 감옥에 갇힌 자들도 숱한 증거를 앞에 두고도 억울한 법이다. 나는 특히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돈을 쫓아 일을 구하지 말기를 바란다. 사람이 좋아 멍에를 같이 메지 않기를 바란다. 그 능력이, 재능이, 사지육신 멀쩡한 건강이 우리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한동안 그리 어울려봐서 잘 안다.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허용하게 되는 게 는다. 괜찮다고 여겨진다. 내 주변을 그리 에워싸면 다들 그런 줄 안다.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것이다. 정당정치의 한계가 그것이고 패거리문화의 경계가 여기 있다. 다들 그래, 라고 하지만 정작 그리 에워싸여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다. 속절없음이다. 세월만 간다. 흩어지기 전까지는 어림없다. 잃거나 빼앗겨야 비로소 안다. 어찌 그런 자들과 사귀겠나? 저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따라가서는 안 되는 일이다.

 

늙으나 젊으나 뭐라 하면 듣지를 않는다. 그 분야에 정통한 사람의 말만 귀에 들어온다. 이미 기운 판이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기운다. 미끄러진다. 이내 살아서 살아봐야 하는 인생의 허망함이여! 그러니 가장 좋은 수는 스스로 병신이 되는 것이다. 몰라서 병신, 알아서 병신, 남들처럼 살아서 병신, 남들 같지 않아서 병신. 그 고달픔을 외면하지 말자. 아픈 데 손이 간다. 나는 그래서 복되다. 잘난 게 없어서, 늘 어렵고 불편한데 또 그만큼 잘 살고 있으니 복이 많다. 얼씨구, 무엇에 정신이 팔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보다 직접적인 말씀을 나는 모른다. 자기 팔을 잘라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아라. 차라리 그러고 살아라. 병신처럼 살아라. 하나님밖에 모르는 쪼다로 살아라. 나는 그래서 종종 너무 속상하다. 부모님 때문에 속상하고 친구들 때문에 속상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 속이 많이 상한다. 꼴랑, 동대문 집 한 채를 어쩌지 못해 여든을 훌쩍 넘긴 장모는 날마다 눈만 뜨면 그 집에 연연해하는 게 슬프다. 이제 물리적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돈돈거리며 살아야 하는 노년이 처량하다.

 

언제 주가 부르실지 모르는 걸 잘 알면서도 설마, 하는 우리네 삶이 그 생각으로 여전히 또 습관에 따라 어떤 일에 얽매이는 삶이어서 불쌍하다. 초연해질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찍어 내버리라. 스스로 불구자로 사는 게 낫다. 지키라. 붙잡으라. 방어하라. 변론하라. 빼앗기지 마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그리하여서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성경은 이르고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성령은 주도하신다. 이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 그래서 그럴 수 있다면 혼자 사는 게 낫고, 떨어져 있는 게 낫다. 그럴 수 없으니 그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하신 것처럼 하는 것이다. 아, 그런데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나 3:1).” 다들 저마다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려 자기가 옳다 여기는 지론대로 산다.

 

그러니 눈만 뜨면 바쁘다. 정신이 없다. 하는 것도 없이 나이만 먹는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2-4).”

 

말씀이 들릴 리 없는 까닭은 정신이 없어서다. 애들도 바쁘다. 종일 쫓겨 다니듯 학교에 학원에 정신이 없다. 조금 숨 돌릴 땐 게임을 해야지, 그게 휴식이라 여긴다. 책을 안 보는 아이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 교회에 나와, 하고 말하면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 시간이 난다면 그 시간엔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 그나마 게임을 하고 놀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항변한다. 바쁘다 바빠. 그러니 또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가. 누가 말하면 나를 부럽다고 한다. 여유로워서 좋아 보인다고 한다. 서로가 그 속을 어찌 알까?

 

내게 두시는 말씀이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마음을 확정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에이 설마, 하면서 하루하루 시간만 흘려보내는 판국이라. 다리를 잘라라. 팔을 자르거나 눈을 뽑아라. 차라리 늙고, 병들어 온갖 죄악된 것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되는 게 나는 복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늙어가는 것을 사랑한다. 그처럼 놓여나기 힘들던 것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라도 버림받는 것이어서 다행이다.

 

나는 놓을 수 없었다. 그게 좋았고 옳았다. 옳아서 좋은 게 아니라 좋아서 옳은 것들이었다. 어울리던 사람들과 정신 팔려 이리저리 바삐 쫓기듯 살던 것들에 대하여, 신경쇠약으로 겁이 먼저 들어 더는 그럴 수 없게 나를 붙드시니 감사하다. 어디 육신이 아파 더는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감사하다. 할 게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주를 바라고 말씀을 찾고 저와 같은 이들의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복되다. 아이는 뭐라 우려하는 선생의 권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트코인에 대한 나름의 지식을 자랑하며, 돈이 있으면 더 투자하고 싶다는 소릴 했다. 그러니 뭐라 한들!

 

그러지 마시라, 그게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 해도 이제 남은 생이 얼마 없으니 그런 데 관심두지 마시라, 해도 그렇게 말하는 내게 서운해 하시는 어른들에게 나는 도대체 할 말이 없다. 차라리 병드시라, 기력이 쇠해 운신을 못하시라,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마나님을 교회 앞까지는 태워다 주면서 본인은 산에 간다는 노인에게 그 기력을 꺾어버리라. 멀쩡한 두 다리를 한 쪽 꺾으시라. 차라리 그게 더 나은 것에 대하여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본래 그런 것이다. 여력이 되면 다 죄로 물들게 돼 있다. 사람 그렇게 선하지 못하다. 머리로는 안다고 하지만 아는 것으로 치면 모르는 이만 못한 것이다. 온통 정신이 팔려 미쳐 날뛰는 세상에서 내남없이 돈돈거리며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인데, 있는 이는 있어서 쩔쩔매고 없는 이는 없어서 쩔쩔매면서도 좋댄다. 됐댄다. 그러니 뭐라 이르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입을 다문다. 말해봐야 감정만 상할 뿐이다. 각자 알아서 사시라. 어쩌겠나. 아무리 다들 어떠하다 해도, 나와 내 집은 주를 섬기겠노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이와 같이 별 수 없는 노릇 앞에서 나는 우울하였고 조금은 슬펐으며 안타까웠고 조금은 심란하였다. 그러니 오늘 말씀이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나 3:1).”

 

어쩔 것인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나로 하여금 온전히 주만 바라고 의지하며 살게 하소서.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8).” 아무리 세상에 좋고 또 좋은 게 넘쳐난다 해도, 다들 그 좋은 것에 열심을 다하고 산다 해도,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9).” 왜냐하면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10).”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