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박국 2:1-2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시편 59:9
다들 저마다 자신들은 옳다 한다. 학장 하나로 교단과 학교가 갈라질 판이고, 이를 보다 못해 신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했다. 여간해선 말을 들어주지 않자, 낼모레 발표해야 할 합격자 명단 발표와 졸업자 명단이 담긴 전산실을 점거하여 선을 다 끊어놓았단다. 오죽하니 그랬을까 싶다가도, 나는 딸애의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며 한숨만 나왔다. 이단이 득세하며 광화문 한복판에서 적반하장으로 집회를 열고, 그럴듯한 것이 진짜를 대신하는 판국이니.
크고 작은 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각기 자기가 옳다고 한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옳다고 한다. 이를 지지하며 누구는 이쪽에 누구는 저쪽에 서서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해댄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그러니 우리가 기도할 것은 난리와 소요를 잠잠하게 해달라는 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있어야 하고 아직 끝도 아니다.
나는 무서운 게 자기고집이다. 그렇게 보면 나야말로 말할 게 없는 사람이겠으나, 죽기까지 놓지 않는 게 죄의 속성이어서 말이다. 너무 열심을 다하지 말기를, 종종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릴 되뇐다. 아이가 학원 보충을 다니느라 밤 열 시를 넘겨 들어오는 것에 부모는 뿌듯함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은 부모의 기쁨이 되기 위해 죽어라 하고 산다. 눈치껏 요령껏. 다들 ‘널 위해서’ 혹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구호를 외친다.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하여도 나는 무섭다. 요즘 붙들려 있는 말씀이 사울 왕의 경건인데, 저는 죽으면서까지 자신의 죽음이 욕되지 않기를. 스스로 바라고 그 바람으로 자살을 하였다.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삼상 31:4).”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사울보다 열심히 경건하기를 바란 인물이 또 있을까?
활에 부상을 당해 죽어가면서도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자신을 모욕할까 하여 스스로 칼 위에 엎드러지다니! 충성도 이런 충성이 없다. 한다고 열심을 다한 생이었다. 전쟁에 앞서 제사를 원했고, 그 곁에 여호와의 법궤를 두길 바랐고, 적군을 맞아 싸우면서도 군사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심지어 아무런 확신도 들지 않자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어 응답을 듣길 원하였다. 이내 죽으면서까지 거룩을 도모하였던 저의 수고를 어쩌면 좋을까? 그래서 나는 무섭다. 누구의 수고와 열심이, 누구의 결단과 의지가 나는 두렵다. 인생이 다 저물어가는 데도 저마다의 고집을 붙들고 사는 꼴이니까.
그러는 내게 오늘 말씀은 무엇이 유익인지 알게 하신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1-2).” 먼저는 내가 지켜야 할 자리, 그 성루에 서서 기다리는 일. 내 안에 드는 의문을 주 앞에 놓는 것. 말씀이었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거였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이런 애들을 상대로 난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이 길이 맞기는 하나. 이 무슨 희망이나 있을까. 나는 파수하는 성루에 서서 기다리다 보면 별의 별 생각에 다 시달린다. 끄달리는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워 어디로 그냥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러니 늘 그럴 때면 노아가 생각나고 아브라함이 생각나고 모세가 생각나고 다윗이 생각난다. 어떻게 그러고들 견뎠을까? 막연하여서 그 터무니없음을 어찌 그처럼 굽히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내 생각하다보면 가슴이 뜨뜻해진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시 59:9).”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기다리다 늙어 죽는 한이 있어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도 홍수 심판의 경고를 묵묵히 받아 방주를 산 위에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다른 무얼 바라며 살까? 너무 막연하여서 집에 기른 종으로나 후사를 삼을까도 하고, 후처에게서 나은 자식으로 대를 이을까도 하였던, 그 심정은 오죽하였을까?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사는 일이다. 쫓기고 쫓겨 적국에서 미친 체 하고 또는 저들의 땅자락 시글락을 터전으로 삶을 일구어야 했던 기구한 도망자 신세인데도,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라!'
나는 자꾸 나의 이야기를 하는데 성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이야기만 한다. ‘하나님의 어떤 목적과 계획’에 대하여,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8-9).” 성경이 흡족해하심은 나의 수고와 애씀이 아닌 것이다. 다만 주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는 것으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심이다.
멀리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완고함 앞에 나는 무섭다. 과연 나는 나의 이 자리에서 기다림을 이어갈 수 있을까?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어떤 우울감이 또 두려움이 나를 자주 엄습하여서 나는 자꾸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다가도 성경의 인물들이, 사건이, 저들의 족적이 없었다면 어쨌을까 싶다. 그럼에도 노아의 인내와 아브라함의 믿음과 모세의 충성과 다윗의 온 맘으로, 이는 내 것이기를.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아이들 가운데 유난히 싫은 애가 있다. 말하는 거나 행동거지가 그렇게 밉상일 때가 없다. 근데 또 그런 애가 글도 제일 먼저 써서, 앞에 앉히고 원고를 같이 보았다. 잘 썼다, 예쁘다, 장하네 하였더니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 아이가 문제이겠나. 내 마음이 밉상이라. 나의 편애가 또 편견이 아이를 그리 판단하고 지레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주 주제로 삼은 것은 ‘배려’다. 나는 논제로 성경구절을 응용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아이들과 같이 여러 번을 읽었다. 무슨 의미인가? 물으면 아이다운 대답으로 엉뚱하여서 다시 읽고 또 읽기를 여러 번 하였다. 밉상인 아이가 말했다. 이해하라는 거네, 이해 받으려면! 순간 다른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그 말이 맞느냐는 눈짓이었다. 풉, 그 명쾌하고 간단한 것을 우린 얼마나 어려워하며 살고 있는지. 아이들은 자신들이 이해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열을 올리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누굴 이해하지 못한 사실에 대하여는 갸우뚱하였다.
실은 그 밉상인 아이가 한 아이만 감싸고돌아 나머지 두 아이가 자꾸 소외된다. 그 애가 못 오는 날이면 잘들 지내는데 꼭 그 애만 끼면 편이 갈린다. 이를 대놓고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그 애가 감싸고도는 애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라, 서로가 서로를 헤아려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주제로 삼아 글로 쓰게 한 것이다. 다들 800자를 채우지 못해 쩔쩔매는데 밉상인 아이는 궁싯거리면서도 가장 먼저 다 써서 들고 왔다. 앞에 앉히고 아이를 가까이에서 보자, 그런 내 마음이 문제였다. 아이는 그저 아이일 뿐이었다.
내게 두신 이 자리, 나에게 파수하라고 두신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오늘 말씀을 되뇐다.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것은 날마다 반복되는 갈등이라.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며’ 여기 이러고 있는 게 내 일이라. 오늘 말씀은 새삼 나의 자리를 이해하게 하신다. ‘세상 지혜로는’ 풀 수 없는 숙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은연중에 주일을 권하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아이면 아이에게 노인이면 노인에게, 나는 ‘성루에 서는 자이다.’ 성을 지키기 위해 세워둔 다락집이다. 별 볼일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무슨 화려한 수사로 구사할 게 없다. 지극히 수동적이어서 나는 지키라고 두신 자리에서 그대로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내가 어찌 이해할까? 헤아려 알면 알수록 더 어렵고 복잡한 것 같지만, 성경의 인물들이 이를 직접 살아갔던 모습에서 배운다. 저들이야말로 오죽했을까? 나야말로 거저먹는 꼴인데.
다들 자기가 옳다 하고 사는 세상에서, 난 내가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다. 두신 자리에서 말씀으로 꼴을 삼고, 누구를 보내시면 저와 더불어 말하고 함께 가는 길 동안에 같이 주를 바라는 것뿐이고. 나는 바울 사도의 증언처럼 내가 받은 것을 전하는 것뿐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다음 일은 다음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다만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주가 이르신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함께 가는 동안 나는 자꾸 들려주고 또 들려주는 게 일이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막연하여서 또 조바심을 내다,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시 59:9).” 하나님이 나의 요새이셨다. 나의 성루는 주의 다락집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16).” 곧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7).” 세상이 온통 난리와 난리라 해도 요동할 거 없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막 13:7).”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왜일까?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