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
스바냐 2:1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 62:5
참 어렵다. 사람이 제일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없이 가볍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그런 걸, 어쩜 그리도 자기 고집에 겨워 사는지. 애고 어른이고, 남이고 나고 다를 게 없는 사람이어서 이를 어쩌면 좋을까? 당최 감당이 안 되는 족속이라. 나는 내가 그런데 다들 어떠하신지? 유난히 나만 과민해서 그런가, 자꾸 속상하고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다.
토요일.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으면서도 이상하게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창가에 듣는 햇살 고운 볕에 등을 대고 앉아 폴 트루니에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점심께 아내가 나오면 같이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건너가 핸드폰액정을 수리하고 올 거였다. 간 길에 기독서점에도 들르고, 이제 막바지라 혹시 세일하는 겨울 코트를 하나 사고 모처럼 데이트를 하듯 구상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속도 편안하였다. 그러니 웬걸. 역전에서 아내를 만나자 불안이 밀려들었다.
네다섯 정거장밖에 안 되는데 염려가 속을 뒤틀리게 하였다. 화장실에 들락거리고 나는 금세 창백하여 식은땀도 났다. 아내는 안 되겠다며 먼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돌아서서 안 가도 된다는 안도감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안하였다. 간단하게 장을 보고 도로 교회로 올라갔다. 무슨 대단한 일을 치르고 온 사람처럼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답답하고 한심하였으나 어쩌겠나? 나는 시무룩하여 어이가 없었다. 심리적인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제지하는 일이어서 억지로도 안 된다. 미리 먹은 안정제 때문인지 몸이 노곤하였다.
꼼짝을 못하게 하시는구나. 혼자 입을 삐쭉거렸다. 아내는 교육방송을 보고 나는 건성으로 책을 읽었다. 나로 하여금 함부로 살지 않게 하시려고, 조심 또 조심 차라리 반푼이로 사는 게 낫다 여기셔서 그처럼 나를 옥죄시는가. 문득 서글프다가도,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습 2:15).” 하는 말씀 앞에서는 안도한다. 돌아보아 경거망동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부르신 자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 처방이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 2:39-40).” 내가 얼마나 멋대로 굴며 살았는지 아는 까닭에 다행이다 싶은 것이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는 없다.’ 하듯 살아오던 삶이 아니었나. 더는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기웃거리며 더는 다른 데 걸신들린 것처럼 헤매고 다니지 않게 하시려고.
확증하고 권하여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하시려고 그러신다. 아니면 억울하고 분하여, 답답함은 나를 못 견디게 할 텐데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게 하시니까. 꼼짝 없이 교회에 있는 게 가장 좋은 것이다. 토요일 오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한가로이 누워 책을 읽을 수 있는 평화로움이라니. 그때 장모가 전화를 하였다. 아내는 말이 길어졌다. 누구를 따라 어디에 갔고, 거기가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으나 통장 번호를 묻고, 이를 염려하여 아내는 성화였다.
참 세상 어렵다. 미쳐 날뛰며 돈에 환장하여 돌아버린다. 나는 전화를 바꿔 침착하게 거기 누구 좀 바꾸라고 하였다. 모 과장이라고 하는 이가 자신들의 ‘기업정신’을 설명하느라 일장 연설을 하였다. 됐고, 여든을 훌쩍 넘긴 노인을 데려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지금 뭐하는 것인지. 장모를 설득해 그만 집에 돌아가시게 하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무슨 화폐 개념의 신기술 네트워크 어쩌고 하는 거였다. 아내는 오빠에가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형님도 알고 있었고 갔다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뭐라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가셨든, 어떤 의미를 알고 가셨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왜 그 연세에 그런 데 관심을 두고 그 아까운 세월을, 말 그대로 거기다 투자하고 있는지! 누가 가자고 하니까 갔고, 가서 듣다보니 좋은 곳이라는 논리였다. 앞서도 무슨 홍삼을 기백만원어치 샀고, 어디서는 무슨 장판이나 물리치료 기계를 또 샀고. 들으니 좋아 보이고 써보니 괜찮은 것 같다지만. 내가 보기엔 다 감언이설(甘言利說)이라. 달콤하니 꾐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좀, 가상화폐라니.
서로가 미쳐 날뛰는 세상이라. 현혹될 게 너무 많다. 좋고 훌륭하고 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얼마 전에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던 노인 아닌가. 오늘일지 내일일지 알 수 없는 생의 막바지에서, 하긴 더 건강하려고 또는 더 잘 살려고 하는 욕심이야 더욱 간절한 것이어서. 아내는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더 통화를 하며 채근을 해보지만. 참 어렵다. 사람이 제일 어렵다. 그럴 때면 나는 오늘의 내가 저절로 다행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그러라고 꼼짝 못하게 하시는 것이려니. 아니면 덩달아 기웃거리고 무얼 모색하느라 나를 정당화하기 일쑤였을 텐데. 부디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그러니 문득 드는 생각이 죽음학교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죽음을 앞두고 나이가 들면서 보다 말씀을 의지하며 성숙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것도 공부가 필요하겠다. 언제 어떻게 데려가실지 알 수 없으나, 그래서 더욱 날마다 매순간을 준비하는 일들 말이다.
생에 대한 애착이야 모든 생명은 당연한 것이겠으나, 주를 바라는 마음에서 더욱 더 그 죽음이 값지고 소중할 수 있기를. 한데 그 당사자들이 좀 더 늦추기만 하려는 게 죽음이어서 대놓고 다 늙은 노인에게 권할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지만 뭐라 말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우린 곱게 늙자. 돈돈거리지 말자. 건강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언제 부르실지 모르니까 날마다 준비하는 삶을 살자. 아내와 둘이 다짐하듯 말하였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6).”
이에 대해 오늘 말씀은 값지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7).” 이를 바로 알 때 허튼 데 마음 두지 않고 살 텐데. 나는 낮에 잠깐 우울하였다가 오후께 참 다행이라 여겼던 게 지금의 내 상태였다. 함부로 쏘다니지 못하게 하시는 게 은혜라. 나대지 않게 하심이 은총이라. 그야말로 ‘너나 잘해’ 하는 처지로 살게 하시는 게 복이었다. 다들 나름의 말품을 팔아 산다. 온통 말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상품을 설명하고 자신들의 네트워크에 대해 마치 유토피아가 따로 없다는 듯 그 짧은 통화에서 거침없이 말을 하던 이가 두려웠다.
아, ‘오직 주만이 나의 구원이시니’ 참 다행이다. 입을 좀 다물고 살 필요가 있다. 설왕설래 너무나 말이 넘치는 세상이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8).” 무엇이 슬프게 하나? 한줌 무게도 안 될 인생을 어찌 그런 데 말품을 팔고 다리품을 팔고 사는가 말이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인생은 속임수라. 집착할 값어치가 없다.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 덧없음에 대하여. 자기 논리에 겨워 바동거리는 삶의 가벼움에 대하여.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이를 아는 것이 복이었다. 가만히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게 은혜였다.
그러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그것으로 이웃을 위함이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1).” 감언이설이란 앞에 것을 빼고 뒤에 것으로만 치장하는 것이다. 모 과정이란 작자는 그 짧은 통화에서, 마치 자신들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에 있어 그 좋은 시스템을 권하는 것인데 어찌 그걸 모르는가, 하고 나를 답답해하는 말투였다.
말품을 팔아 사는 이들의 공통된 화법이다. 어쩌겠나. 앞서 하나님 사랑이 우선되지 않는 모든 선은 악이다. 아무리 좋고 좋다고 하나 지옥이다. 돌아서면 결국은 돈이라. 대놓고 통장번호를 묻고, 그러니 그 이익금을 나눠드리려는 것이라니! 할 말이 없어 마음이 어려웠다. 뭐라 한들 싸움밖에 안 된다. 그러니 다 늙어서 왜 그런 델 기웃거리며 이 추운 날씨에 그러고 나돌아 다니시는지. 그게 뭐 그리 중한 일이라고 그리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지.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부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모두가 사는 게 처음이어서 그렇다. 나이가 들어 삶에 경륜이 있으려니 하지만 저 또한 늙음이 처음이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생이 처음이라, 생경하여서 뭘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러니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돈이면 좀 나을 것 같아서, 실제는 돈이면서 온갖 감언이설로 덧대어 감춘다.
제 마음을 감추고 말을 감추고 생각을 감추고, 이를 감추는 속셈은 단 하나다.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이어서 말이다. 그러니 성경을 우리에게 두신 것인데, 이는 뜬구름 같고 그저 돈돈거리는 세상이 실제인 것 같으니까! 아, 나의 영혼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자. 부디 곱게 늙자. 바르게 죽음을 맞자. 언제 오라 하실지 모르는 때에 주의하고 또 경계하자. 함부로 나대지 말고 멋대로 기웃거리지 말자. 나의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2).”
그러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