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전봉석 2018. 2. 7. 07:06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학개 2:5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편 65:10

 

 

 

이 길이 맞나? 오늘 여기는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 돌이켜 주가 어찌 나를 인도하셨는가를 묵상해보면 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 때, 그때가 아무리 좋고 좋았었다 해도 오늘의 최악보다 못하다. 내가 그리 확신하는 것은 나의 지나온 날을 돌아봐도 알지만, 여전히 거기에 있는 친구를 또 누구를 지켜봐도 안다. 모처럼 친구와 통화를 하고 어찌 지내는가? 서로의 안부를 물 때, 아직도 그러고 있는 저의 모습이 나는 이제 낯설다. 저가 안 됐다.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게 된다.

 

오늘 말씀은 이를 상기하게 하신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5).” 더는 아무것도 자랑하고 내세울 게 없는 것 같지만 그래서 어찌 보면 나를 저가 처량하게 여기려는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죽지 못해 사는 식의 저의 바쁨과 쫓김과 피로함을 나는 불쌍히 여기게 된다. 아직도 왜 그러고 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아예 안 믿는 친구라면 또 모를까.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하여서, 나는 그 길을 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어울려야 하는 안 믿는 이들의 문화라는 게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신하려 드는 온갖 쾌락과 만족함의 위선뿐이니. 오늘 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미투(Me too) 정쟁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개선할 수 없는 문제여서 수컷과 암컷의 가장 동물적인 본능의 몸짓으로 구애하는 것이고 희롱하는 일일 거였다. 욕먹을 소리지만 새삼 ‘여자들만 당했다’ 하는 시각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구조적인 문제고, 그릇된 사회 문화에 의한 산물이고, 원초적으로는 각각 본능에 의한 문제이다.

 

하나님 없는 자리의 자연스러움이다. 위선과 기계적인 억압의 관계가 자연스럽고, 이에 술이 들어가면서 그나마 위선이 벗겨지고 기계적인 관계마저 와해되면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각계각층으로 번지고 있는 오늘 날 우리의 민낯을 나는 부끄러워한다.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듯 사회 각층의 인사는 열변을 토하고, 능청을 떠는 모습이 오히려 역겹다. 그런 문제가 어찌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말이다. 다 똑같다. 크고 작은 또는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서로는 망각을 원하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진정하고 통렬한 반성은 없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실제 자신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길은, 돌아보아 내가 어찌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대목에서다. 내 의지와 노력이 아니었다. 나의 결단도 또 실행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좌절하여 애통함뿐이었다. 그때 주의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자.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5).”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여정이 끝날 때까지 나는 거듭 애굽에서 나오는 길이다. 이를 지지하는 것이 주의 언약이고, 주의 영이 계속하여 내 안에 머무시는 것이고, 이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막연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시 65:10).”

 

나는 무슨 일로 친구와 통화하며, 또 어떤 한 아이와 오늘에 처한 이야기를 나누며, 저들이 머물고 있는 그곳의 척박함을 생각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딱히 어디 일자리를 구할 의지도 없이 동거하는 아이의 숙소에서 같이 먹고 자고 하는 아이의 생활에 대해, 뭐라 한들.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데 그것을 문제라 일컬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여전히 삶의 보람을 찾지 못하고 일에 끌려 다니며 죽겠다는 소리만 해대는 친구에게는 또 무슨 말을 한들 저가 나의 삶을 알기나 할까?

 

저녁에 가정 예배에서 같이 읽던 말씀 중에,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 하는 말씀이 귀에 쩡, 하고 울렸다. 나는 오늘 고비 사막을 걷고 있어도 먹을 거와 입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고, 뜨거운 볕과 차가운 어둠이 나를 해치 못하였다. 이는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시 65:10).”

 

돈도 없고 차도 없고 TV도 망가져서 그 신세가 처량할 거 같은데, 하나도 불편하지 않으니 그게 더 신기한 일이다. 친구에게 비치는 내 모습이 은둔의 평온함일지, 자기만족의 하나일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문득 나도 이게 된다. 누구의 구호나 어떤 간증에서 듣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말해줄 수 있는 거였다. 난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니! 이를 어떻게 아이에게 들려주면 저가 볼 수 있을까?

 

스물다섯. 아, 그 아름다운 나이를 한 시가 다 돼 일어나 출근한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지. 설마, 했는데 아예 거 들어가 살고 있을 줄이야. 참 겁이 없다. 내 딸아이였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끌고 왔을 것인데. 그러니 그런 삶에 처한 가운데 주일을 기억하고 예배를 바랄 수나 있겠나. 뭐라 하면 토라져 연락조차 하지 않으니, 속이 볶여 나 혼자 쩔쩔매는 일이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건 것도 실은 그 아이 어디 일자리 좀 없나 말해주려는 것이었고. 참으로 이 안타까움은 내 몫인가? 당사자들은 태연하여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씀처럼 저들이 듣지 않으니 발에 먼지라도 털어 더는 관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그럼 내 안에 볶아대는 이 심정은 또 무엇인가 싶어. 주님, 하고 나 혼자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오늘의 이 평안을 어떻게 해야 저들에게 보여주어 들리게 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이력서를 준비하게 하고, 주일에 좀 보자! 하고 말할 때의 어떤 서글픔이 나에게 온당한 것인지. 안 됐고 안 돼서 주의 이름만 부른다.

 

그러는 게 어떤지, 나는 잘 안다. 그때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니 주의 강권하심만이 긍휼하심으로 함께 하셔야 할 일인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듯이 ‘은총도 성욕을 이기지는 못한다.’ 어찌나 당돌하고 궤변적인지. 그러는 거 아니야, 하고 말해주어야 하는데 나는 안타까움으로 곁을 지킬 뿐이다. 언제든 돌이켜 주를 바라볼 때, 행여 내가 이 자리에서 불빛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4-5).” 어쩌겠나. 오늘 내게 두시는 사명이 너무 막연하여서 나는 종종 길을 잃을 것 같다. 이게 맞나? 이 길이 맞나? 하고 수시로 드는 갈등과 염려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오늘의 말씀처럼 주가 어찌 나를 인도하여내셨는지 돌아보면 그 답은 선명하여진다. 주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며 그 언약이 오늘의 나를 붙들고 계심을 말이다. 부디 저들도 그러할 것이다.

 

조금은 풀이 죽어 있는데 두 꼬맹이가 슬그머니 들어왔다. 다른 학원 끝나고 갈 데 없어 온다니까, 나는 과자를 꺼내주고 물을 내주었다. 둘 다 엄마가 일을 하는 터라 집에 가야 아무도 없으니 저리 배회하는 것이어서. 같이 말을 섞고 아이들과 같이 히히거리다 뭉쳤던 마음이 풀렸다. 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주의 은혜만을 구한다. 다 주의 것임을.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8).” 이에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15).”

 

황폐했던 나의 영혼의 때를 기억한다. 이처럼 스스럼없이 찾아들어오는 아이들을 위하여서도. 이내 다 털리고 잃어야 속이 후련 하려는지. 아직 젊어서 그 왕성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서일지, 아니면 여전히 기력이 쇠하지 않아 아직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기확신이 있어서들 그러는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17).” 두려운 마음은 내 몫이라. 나는 저들을 위해 기도한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5:2).” 결국은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3).” 주의 은총만이 살 길임을. 그러므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