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스가랴 1:5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편 66:20
곧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4).” 그만큼 어려운 것 같다. 누구는 듣고 누구는 외면한다. 보면 사람도 정리가 필요한듯하다. 버리지 못하고 쌓아만 두는 게 어찌 물건들뿐이겠나. 본받지 말라. 조상도 선지자도 영원하지 않다.
주소록에 올라있는 이름들 가운데 여러 명을 지웠다. 카톡에 실린 무분별한 이름들도 가차 없이 다 지워냈다. 너무 많다. 더는 연락도 않고 서로 새삼 아는 체 하는 것도 민망한 관계에 대하여는 미련을 두지 말자. 모든 관계는 유효기간이 있는 것이어서 사람과 사람의 동행하는 기간도 마찬가지이다. 그 가운데 누가 자꾸 마음에 밟혀 전화를 하였는데, 저는 받지를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그만두었다.
또한 사물도 사람도 다 제자리가 있는 듯 하였다. 물건 따위가 그럴까 싶지만 아니다, 저도 제자리가 있어서 어디에 놓이는가에 따라 쓰임이 다른 것이다. 하물며 그러한데 사람은 어떻겠나 싶었다. 모든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이렇게 묻는다.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슥 1:5).” 죽고 못 살 것처럼, 입에 혀처럼 굴던 사이가 어디로 간 것인지. 다 그게 그러니까 그때뿐이라.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명언인 듯하다. 유효기간이 지나면 아무리 소중했던 사람도 더는 ‘의미 없음’으로 분류되는가 말이다.
아이들 다섯이 한꺼번에 와서 재잘거리며 수업을 했다. 하나가 물을 달라하면 나머지도 덩달아 목마르다고 난리고, 하나가 엉뚱한 질문을 하면 나머지도 똑같이 모르겠다고 아우성이다. 어리다는 건 곧 성장할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귀한 시절이다. 성가시고 귀찮다가도 그게 또 앙증맞기도 하여서 될 수 있으면 다 받아주고 같이 변죽을 울려댄다. 왁자하니 아이들이 떠들며 수업하다 가면 졸지에 몰려드는 고요가 되레 무겁다. 한 녀석은 유난히 입이 싸다. 미주알고주알 안 해도 될 말까지 옮긴다. 아빠 대신 들어온 아저씨 덕분에 애가 좀 안정을 찾은 것인지, 전에처럼 불안해하지는 않는듯하다.
아이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다 옮겨볼 수는 없으나 다들 그 나이 때 겪어야 할 것보다 과하거나 모자라서 생겨나는 불만과 원성이 가득하다. 일차적인 원인은 언제나 그 부모다. 너무 과해 아이를 과잉보호한다든지, 너무 거칠어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성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다든지. 모든 사람은 분리를 겪으며 세상에 나오고 매번 분리를 겪으면서 성장을 이뤄간다. 모태에서 나와 탯줄이 끊길 때부터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는 과정에서도 그와 유사한 분리가 이루어진다. 더러는 부모가 ‘여전히’ 탯줄을 끊지 못한 채 아이를 낳고 기르는 형국이라 그 관계가 참 기이하다.
들어보면 아이만도 못한 부모가 너무 많다. 빤히 다 아는데 아이 몰래 담배를 피우는 엄마, 다른 여자를 만나는 아빠, 저들 다툼의 화두는 아이의 상상력 가운데서 부풀려져 기괴한 어른들의 세계를 만들어버린다. 어쩌나. 나는 아이들과 씨름을 하듯 저들 이야기에 또한 그 말 못할 속앓이에 덩달아 숨이 막히곤 한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면서 번번이 그 아이들에게서 여식을 떼어놓곤 하는 엄마의 과잉보호가 문제인 아이. 끝나자마자 숨 쉴 겨를도 없이 전화가 오고, 다음 일정을 일러주는 부모의 친절이 무섭다.
일시적이겠으나 나를 저 아이들 곁에 두신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실 거다. 우리는 매일 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어쩌다보니 아이들을 건사하는 일이 오늘의 사명이 되었다. 아내는 늦게 또 한 아이 엄마와 길게 통화를 하며 아이를 두둔하고 엄마를 위로하였다.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우리를 두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천국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31).” 자꾸 커져만 가는 내 안의 충만함이 가지를 쳐내고 돌을 골라내고 거름을 주며, 그와 같은 고단함을 달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 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이 어찌 나무만의 탓이겠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가령 한 아이가 너무 밉다. 하는 짓이 얄밉고 되바라져 화딱지가 난다.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하게 또 묻는 그 애 때문에 다른 애들까지 덩달아 통제가 어렵다. 그런데 또 눈치가 빨라서 그래놓고는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을 다 한다. 가까이 앉히고 같이 원고를 보며, 잘했다 참 잘했다 하며 칭찬을 해주니까 아이가 조용하다. 머쓱한 것이다. 역시, 훌륭한데? 하고 어떤 기대와 격려를 퍼붓듯이 해대니까 아이가 되레 침착해지는 것이다. 아, 늘 다그쳐 몰아세우는 부모 밑에서 사는구나!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픈 데 더 손이 자주 가는 것처럼, 내 안에 두시는 기쁨의 충만은 엉뚱한 데서 위로를 얻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알 수 있다. 내 마음으로 하는 일보다 주님의 마음으로 하는 일이 더 쉬운 거였다. 나는 그저 밉고 속상하고 얄밉고 귀찮아서 투덜거리기 일쑤인데, 아이의 변화는 내가 변하여 기도하는 마음에서 감지되는 것이었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긴다는 것은, 그럼에도 다시 돌아보아 주의 마음으로 마주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저 애가 아니라 내가 달라지는 경험을 한다. 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그 일 가운데 우리를 두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차이가 있었다. 무슨 일에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 그런 주님의 마음.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주님.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 심판 날이 이르기까지 지탱하고 보호하시려고.
아이들과 지내다보면 내가 먼저 하루에도 몇 번씩 허물을 벗는 것만 같다. 소위 ‘있는 집’ 아이와 ‘없는 집’ 아이의 간극은 엄연하여서 아이들의 척박한 환경이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관심과 애정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허물없이 툭툭, 치고 장난을 거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의 허기진 영혼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같이 깔깔거리며 웃다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게 결코 막연한 구사가 아니었다.
나는 카톡에 올라있는 더는 연락도 안 하고 새삼 아는 체 하는 것도 민망한 아이들을 숨겼다가 도로 꺼내놓았다. 전화번호에 있던 것들을 다 지웠다가 도로 다운받아 채워두었다. 공연한 일이라. 사람과 사람 관계는 죽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어서, 유효기간을 운운할 게 아닌 것이다. 뜬금없이 생각이 나면 생각이 나는 대로, 또 연락도 해보고 하면서 저를 두고 기도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이려니. 그래 맞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34).” 무엇을 말하고 살고 있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5:18).” 결국 내 안에 든 것이 문제이었구나. 세상은 온통 난리지만, 나는 주어진 공간과 시간 안에서 내게 두시는 아이들과 저들 마음과 나의 마음을 돌보며 지내는 게 일이었으니. 그럴 때면 내가 할 일은 기도뿐이라.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20).”
한참 내 기도를 하다보면 어느새 저 아이를 놓고 기도한다. 내 생각으로 가득했던 마음인데 언젠가 저를 향한 마음으로 가득하여진다. 주가 나의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실 것을.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 아니하셨음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게, 내가 그럼에도 이 아이를 위해 마음을 쓰고 있을 때이다. 자꾸 신경이 쓰여, 말하고 또 말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러고 있는 내가 다 신기할 따름이다.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듯 마음이 저절로 그리 기울어져 있는 것에 놀라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날 보고 웃을 때 나도 행복을 느낀다.
밭에 감춰진 보화였다. 힘에 겨워 쩔쩔매는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언제나 나만 쉼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목마를 새 없이 흥에 겨워 명절을 나고 있는 중인데 그 큰 날에 하필 예수님은 왜 저런 말씀을 하셨는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실은 그 수고와 애씀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거였다. 기계적이고 소모적인 열심을 물리치신다.
그리고 보화는 오직 하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다른 어떤 것으로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사람도 사물도 그 어떤 의미도 진리도 다 헛된 것임을. 그런데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5:40).” 그래서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기도하기를 그래서 최소한 이 묵상글을 쓰는 만큼만 알고 의지하고 붙들고 살게 해주시기를.
곧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2).” 사람들로 시달리다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게 하시려고, 나로 저처럼 불과 물을 통과하게 하시더니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