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전봉석 2018. 2. 11. 07:34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시편 69:29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이다. B.C. 520년에 시작하여 515년에 걸쳐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도와 스룹바벨은 성전을 완성하였다. 해설을 읽고 내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하는 주의 말씀이다. 이때 구하고 또 바라야 하는 게 은총일 테고 말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7).”

 

기분이 푹 가라앉은 하루였다. 아내와 딸애는 베란다에 낀 곰팡이를 제거하고 종일 대청소를 하느라, 나는 혼자 교회에 있었다.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읽었다. 그러게. 말씀 그대로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시 69:29).” 불쑥, 누구를 떠올렸고 그러다 또 마음이 우울하다가 책을 읽다가 혼자 서성거리는 토요일 오후는 길고 지루하였다.

 

이는 내 힘이나 능력으로 되지 않고 주의 영으로만 된다. 말씀을 다시 곱씹으며 생각한다. 교회를 이루어 가고 교회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내 의지나 노력이 아닌 거였다. 하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럼 이제 이것으로 끝난 것인가? 믿음으로 죽어 구원에 이른 것이니 천국은 갈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안이해도 되는 일인가? 톰 라이트의 요지는 그것을 묻는 거였다.

 

성품이 바뀌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되어야 하는데,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나?  베드로 사도는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이는 자발적인 수고와 애씀의 노력이 따라야 하는 일이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게 아니다. 처음에는 어렵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나의 본성이 또 기질이 자주 부딪친다. 거스른다. 내 안의 다툼이 또 싸움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믿음이 다가 아닌 것이다. 필연적으로 믿음에는 덕을 세워야 한다. 덕이란 본이 되는 태도다. 이에 또 위선과 기계적인 모방이 앞선다. 끊임없이 나의 의가 우선되고자 하는 것이다. 덕이란 사려 깊은 마음이다. 내가 그처럼 어려워하는 것이다. 은혜를 베풀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다. 어진 성품이다.

 

참 어렵다. 남들에게 보이는 나와 실제의 나는 그래서 다르다. 다른 것을 또 내가 더 잘 아는 일이어서 힘들다. 나는 좌절하여 바울의 호소를 듣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점심도 안 먹고 언제 끝나고 나오려나 했더니 감감무소식으로 다섯 시가 다 됐는데도 연락이 없는 것이다. 순간 뿔딱지가 난다. 나를 이처럼 막대하는가, 싶은 생각이 훅 일면서 나는 입이 댓 발 나왔다. 특유의 그 뾰로통하여 말이 없는, 기질적으로 내가 생각해도 고약한 것이다.

 

믿음에 덕을 세워야 하는데, 그런 거 보면 나는 참 덕이 없는 사람이라. 아내와 딸애에게 수고했다고 말 한 마디 따뜻하게 할 줄 모른다. 자 그럼, 덕에는 지식을 더해야 한다. 뭘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돕지는 못할망정 그런데 되레 미안함이 화딱지로 나오는 경우라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혼자 씰룩거리며 오후 내내 뿔난 사람처럼 책만 읽었다. 날씨마저 우울하고 혼자 있는 게 힘들었다. 내 안의 여전한 어린아이는 돌봄을 원하고 누구의 관심을 바라는 거였다.

 

말씀으로 채워지고 ‘그리스도인의 미덕’으로 나아질 수는 없는 것일까? 책을 읽으며 이해하고 깨닫고 바라는 나와 실제의 나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뚱하니 혼자 별난 사람이라. 그러면서도 또 그러고 있는 내가 못마땅하고 한심해서 답답하였다. 그러니 주를 바라는 마음이 내 생각이나 내 의지에 의해 갈고 닦아 연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식은 그와 같이 나를 바로 아는 데서 시작하여 애통함에 이르는 일이다. 온전히 주를 바라는 데서 덕이 나오고, 그 덕은 주의 영으로 채워져 가는 지식에 의한 것이다.

 

지식에 절제가 요구된다. 알면 알수록 나는 내가 얼마나 절제가 부족한 사람인가를 여실히 느낀다. 절제에는 결국 인내다. 참고 또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 이를 더욱 효율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마음이다. 무던함이고 묵묵함이다. 때론 이 모습이 미련하게 보인다. 누구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왜 저러고 있나, 싶은 것이다. 종종 나는 절망한다. 도무지 다들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뭐라 이르면 ‘너나 잘해’ 하는 메아리가 울려오는 것 같다. 그렇게 기운이 빠진다. 그러니 점점 더 외롭다. 혼자 있는 게 어렵게만 느껴진다.

 

아, 그래서 절제에는 인내였구나. 같이 어울려 저들과 같이 바라고 구하며 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절제라면 (자연스럽게 나는 이제 같이 어울려 뭘 추구하고 바라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혼자 있으면서도 다시 어울려 한데 이어지지 못하는 결과다. 서로 대화의 결이 다르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다루는 문제가 전혀 별개의 것이 되었다.) 인내하는 것으로 참고 또 견뎌내는 일이겠다.

 

그래서 또 인내에는 경건함이었구나! 경건함이란 소중히 여겨 받드는 마음이다. 필연적으로 엄숙함이 깃든다. 그런 자가 굳건하였다. 부화뇌동하지 않는 것이다. 남들이 어떻던, 모두가 어떠하든지 묵묵히, 또 묵묵히 노아와 같이 방주를 짓는 경건함이다. 주의 말씀임으로 순종은 때로 무모하여도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일이었다. 주의 뜻을 소중히 받들어 섬김은 나 혼자 독불장군으로 살라는 게 아니라, 형제우애를 더함으로 길을 잃지 않는다. 헤아리는 나의 헤아림이 저들로부터 헤아림을 받는 일이었다.

 

말씀을 묵상하고 있다 보면 이처럼 참으로 오묘하다. 나의 생각을 몰아가시는 게 느껴진다.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삶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나의 됨됨이를 마주하게 하신다. 아, 나는 가난합니다. 물질적인 것으로만 가난한 게 아니라 내 안에 허기지는 생각과 원함과 바람이 채워질 수 없어, 나의 심령은 가난합니다. 가난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주의 위로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아 천국은 그런 자의 것이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시 69:29).” 다른 그 무엇으로는 위로가 될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한다. 통화 무제한을 쓰면서도 누구와 쉽게 통화를 하지 못한다. 예전처럼 선생을 자주 찾지 못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히히거리던 친구와의 대화도 단절된 지 오래다.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 그런 얘기 말고, 예전에 주제로 삼던 그런 유의 이야기들 말고. 내가 원하는 대화를 저는 꺼려하고 저의 관심은 더 이상 나의 관심이 아닌 것이다.

 

가난하여서 나의 마음은 쓸쓸한데 그 슬픔으로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1).” 금세 나를 덮칠 것처럼 넘실거리는 외로움이 또한 쓸쓸함이 그래서 주를 바라게 하였다. 저 천국을 사모하게 하는 것이다. 저기, 저 약속의 땅을 바라본다는 것.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내 안에 살고 죽음이 한데 공존하는 일이었구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1-2).” 내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은혜를 더하셨다 하여 여전히 죄를 바랄 것인가? 자연스럽게도 싫어지게 된 것들, 아직 예수와 멀리 있는 친구들의 관심과 저들의 화두에서 나는 이제 죽었다. 비트코인이 어떻고, 무슨 연예인이 어떻고, 나름의 문학과 예술과 정치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같이 논할 게 없다. ‘어느 날 나는 죽었습니다.’ 감각이 없다. 더는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연락할 친구가 없다.

 

사느라 그저 사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일들이라, 살면서 그런 얘기를 더는 바라지 않으니, 죄에 대하여는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바라는 것, 계산하는 것이 있었으니 저 천국을 바라는 것이라. 단지 그곳에 들어가는 데 목적이 다가 아니라 주와 함께 그 좋고 좋음을 누리고 싶어지는 어떤 열망.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바라는 게 서로 달려졌으니, 어쩌면 내 안에 이는 외로움은 필연적일 거였다.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

 

나 같은 자를 이리 두시는 까닭이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2).” 내가 이룬 것이라면, 그 공로를 기리며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를 바랄 것인데. 나는 그저 면목이 없는 사람이라. 나 같은,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