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전봉석 2018. 2. 13. 07:10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스가랴 6:15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71:23

 

 

 

세상의 주가 다루시는 바람이 사방으로 나간다. 이에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 6:12).” 그리하여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15).”

 

그래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편 71:14).” 곧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23).” 조금은 심심하고 지루해하다, 누구를 생각하고 함께 어울려 놀던 날들을 그리워하다, 어디 훌쩍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몸살을 앓다, 더는 부질없는 것이어서 묵묵히 주를 바라는 일.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 최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주의 성령이 세상을 바람처럼 드나드신다.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돋아 ‘자기 곳’에서 주의 전을 건축한다. 사람은 개개의 주의 전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멀리 떠나있던 사람들도 돌아와 주의 전을 건축하는 삶을 살 것이다. 악한 이는 악함으로 주의 전을 더욱 확실히 한다. 선한 이는 더욱 주의 전을 빛낸다. 주가 행하시는 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게 합하여서 선을 이룰 따름이다.

 

오늘 본문을 그리 읽었다. 읽는 족족 내게 이르는 말씀이다. 내게 두신 곳에서 주의 전의 건축하는 삶이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 무엇으로 답답하고 또는 서러워하다가도 그래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하면 이제는 하나님뿐이시라. 친구들을 만난들, 누구와 어떤 일을 도모하여 제 아무리 선을 이룬다 한들. 그 수고와 노력이 보람이 되어 삶의 의욕을 더한다 해도 보니까 그게 다 부질없는 것이더란 말이지. 사람관계는 좋을 때나 좋은 것으로써 더욱 바라던 만큼 실망뿐이었고, 꿈도 낭만도 모두 이 땅을 기반으로 할 때 헛된 것이었으니까. 부질없다는 것은 기어이 당하고 난 뒤에야 깨닫는 가장 험한 꼴이었다.

 

그러니 무엇이 가장 고상한가. 내가 주로 만족하는 일. 하나님으로만 감사하고 찬송하는 일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으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은혜가 깊으면 영광도 깊다. 나는 투덜거리다가 정신이 바짝 든다. 어느 늙은 시인의 덕망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게 현실이다. 저가 기독교로 귀의하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그 고상을 다 떨고 다니더니, 세간의 부끄러움이 될 줄이야. 노년에 그 모습이 두렵다.

 

온갖 성추행을 일삼아 지나온 날 숱한 후학들에게 욕이 되는 인물로 부각되었으니 저의 한 뼘도 남지 않은 생을 어쩌면 좋을까? 시치미 뚝 떼고 사는 것은, 지난 주일 다윗을 통해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가 어쩜 그렇기까지 한가, 싶을 정도로 유부녀를 농락하고 임신시킨 후 이를 무마하고자 거드름을 떨며 저의 신랑을 전쟁터에서 끌어올려 은혜를 베푸는 척 하고, 이 또한 여의치 않자 기어이 전장에서 죽이라 하는 편지를 그 손에 들려 보냈으니. 저가 죽자 기어이 여인을 들어 제 것으로 취하고 1년 남짓 무슨 낯짝으로 살았을까?

 

끔찍하다. 사람의 사람됨이 끔찍하여서 연일 사람들 입방에 오르며 평생을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진 것에 대하여 나는 한숨을 쉬다, 부끄러워하다, 누가 혹시 알까? 나의 지난날을 가만히 생각하며 주 앞에 은혜만을 구하였다. 그로 인해 조롱당하는 것이 주님이시라. 교회라. 저 한 사람의 추태가 아니라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는 까닭이 되었으니, 총리를 지낸 모 장로는 저가 모시던 이가 탄핵을 당해 감옥에 있고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에 어느 교회에서 강연을 하네, 모 대학에서 연설을 하네, 그 주제가 그리스도인이라.

 

부디 자중하자. 살면 살수록 그리스도인을 산다는 것은 자중함이라. 나대지 않는 것이니,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자신의 어떤 업적을 하늘나라의 공로로 착각하는 듯하니, 아 그게 아니었구나. 그 모든 게 헛된 것이었구나.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

 

늘 혼자 들어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 나는 특별히 보호를 받는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니었으면 누구보다 나서고 이리저리 돌아치며 뭘 꼭 이루어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텐데, 나의 월요일은 어김없이 혼자였고, 지루하다가 슬프다가 쓸쓸하였지만 그러므로 내가 바랄 수 있는 게 주님뿐인 것이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였다.’ 예전처럼 전화 통화조차 할 게 없는 것이 서로 사는 세상이 이미 다르다. 생각하고 바라는 게 다르고 전혀 다른 언어체계로 사고하고 있었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3).” 곧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이처럼 귀히 여기시니,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 돌아오면서 약국에 들러 파스를 여러 장 샀다. 늙으신 장모 것까지 한꺼번에 사느라 그 양도 많아졌다. 매일 어디에 바르고 붙여야 하는 통증의 날들이지만, 그럼에도(그래서) 주를 바랄 수 있게 하시니 이 또한 귀한 일이라.

 

결국은 나로 하여금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12).” 하나님께 합당히 행함이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일컫고 이는 더 이상 세상에서의 추구와 가치와 나름의 이상과 판단을 모두 배제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라도 된다. 알아주지 않아도 되고 알려야 할 것도 아니어서, 하나님과 나의 문제라.

 

나는 다만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라. 돋아나서 그 자란 곳에서 주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내가 할 일은 찬송하는 것. 누구에게 더 효율적으로 들리게 하려고 온갖 기교와 현란한 테크닉을 선보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좀 더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려고 티켓을 강매하거나 여러 날 홍보를 거듭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말씀이 말씀하신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 6:12).”

 

이는 주의 영광이 나타나길 기다리게 하셨으니,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곧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히 1:3).” 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만으로 나의 만족이 모든 게 되게 하신다. 다른 무얼 바라고 구하다가도 온전히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게 하심이다.

 

그럴 때,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왜냐하면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셨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 그래서 나는 할 게 없어 다행이다. 할 줄 아는 게 없어 주만 바란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주님으로만 감사한다.

 

명절 앞이라 다들 물건을 납품하랴 수금하랴 바쁜가, 텅텅 빈 건물 안에 나는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지루하고 심심해서 주를 바랄 줄이야. 누굴 그리워하다 주께 아뢰고 있을 줄이야. 누가 들으면 욕할 소리지만, 나는 정말이지 할 수 있는 게 없어 하나님으로 만족한다! 내 몸뚱이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어서 앉으면 어디가 아프고, 누우면 어디가 아프고, 서 있자니 어디가 아프고, 말 그대로 사면초가라. 누구에게 말한들, 나도 내가 거추장스러울 따름인데. 아하, 나는 나사로를 생각하였다.

 

저는 저러고 있는 게 최선이었으니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걸 다 한 생이었다. 왜 예수님은 굳이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를 지칭하시고 저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게 하셨는지 알겠다. 저는 결코 한 게 없는 사람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나사로라. 그 이름이 뜻하는 것이다. 온전히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삶으로써 말이다. “보라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나는 오늘 아침 말씀이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에서 위로를 얻는다. 나의 복됨을 주께 찬양한다. 약국의 약사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가방에 여러 장의 파스를 한꺼번에 구겨 넣고 있는 내게 물었다. 이걸 그렇게 자주 붙이세요? 그러게 말이다. 이걸 그렇게 자주 붙이고 산다.

 

그럼에도 나의 소망은 하나님이라.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 전날에 책을 읽으며 메모해두었던 성경구절 하나하나가 모두 나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이었구나.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사는 삶이란, 저의 남은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으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돋아나라.

 

“보라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러므로 돋아나라!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시 71:15).” 곧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7-8).” 주로 만족함이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음을. 그러므로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9).”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