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모든 일

전봉석 2018. 2. 19. 07:12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스가랴 12:1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시편 77:12

 

 

 

일련의 모든 일이 주의 경고라. 외치는 자의 소리라. 그래서 성경은 일러,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딛후 3:14-15).” 단순히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그리 애써 힘껏 배우고 확신한 데 거하여야 한다.

 

곧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6-17).” 나를 온전하게 하시는 데 그 목적이 있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와 같은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지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게 한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슥 12:1).” 주의 백성에 대한 경고다. 저는 하늘을 펴시고 땅에 터를 세우신 이시다. 내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듣게 하신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시 77:12).”

 

다시 말하지만 그러므로 그 목적은 나의 온전하여짐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장차 누릴 저 본향의 세계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두말할 것 없이 온통 음란하고 부정하고 사욕에 가득하며 정욕과 탐심으로 사는 날을 숭배하는 세상이다. 누구랄 것도 없다.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둘째,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로써 만족하는 삶이었다. 훗날 주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시려 담대함을 주신다.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으나 이를 도말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시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일러,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셋째,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2-3).” 덧붙여 요한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고, 그 고난에 대하여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남들이 다 괜찮다고 해도 주 앞에서 스스로 아니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두가 적당하다고 할 때 우리는 모자람을 느끼며 주의 도우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이다. 영성적인 삶이란 게 그런 거였다. 명절을 지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설교는 강단이 있었고 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였다. 요즘 부쩍 붙들려 있는 대목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어서, 이러저러한 환경과 여건을 볼 것 없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 사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그럴 때 사랑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삶으로 살 수 있다. 실질적으로 그게 그럼 어떤 삶인가? 소금이 먼저였다. 내가 녹아 나를 내어주어 맛을 내고 썩는 것을 막아야 하는 소금이었다. 후에 주을 나타내는 빛이었다.

 

먼저는 소금이고 다음이 빛이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곧 그 빛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소금으로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때 산 위에서 동네를 비추는 착한 행실이 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니까 내가 주 안에서 순응하고 만족하는 삶으로 살아갈 때 이는 착한 행실로 반영되어 생활 가운데 나타나며 이를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영광을 주께 돌리게 되는 것이다. 영성으로 산다는 게 이처럼 간단하고 명료하였다.

 

이는 이 땅에서의 결실에서 득을 얻으려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날’ 곧 그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세상이 아무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 해도 나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그와 같은 목적으로, 이 아침에도 ‘생명의 말씀을 밝혀’ 주신다. 결코 나의 달려가는 이 길에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을 확신하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성경의 원리다. 영성의 전제다.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이란 ‘착한 행실’로 증명되어야 한다. 말씀은 엄중히 이르시되 ‘때를 아끼라.’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참 신기하지? 내가 두루 읽고 있는 여러 권의 책과 어제 아버지의 설교와 요즘 나의 관심이 마치 나 몰래 서로 애초부터 약속을 하고 있던 것처럼 한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이 일이 가능한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오늘도 배우고 배운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슥 12:1).” 하면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시 77:12).” 이 원리였다. 이르시면 귀 기울여 세미한 주의 음성을 듣고 이를 읊조리며 주가 행하시는 일을 낮은 소리로 되뇌이는 삶을 삶으로 살아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이 둘이 싸우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날마다 내 안의 아우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라. 소금은 먼저 녹아져야 하듯이 내가 죽지 않고는 내 안의 주의 영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성경의 원리였다. 기어이 내가 죽을 때 나는 다시 살리심을 얻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그만큼 내가 구별된 자였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한데 모여 같이 성경을 썼다 해도 그 맥락을 이와 같이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 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 같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내 음성으로 주께 부르짖는데 그게 실은 노아가 그리 기도했었고 아브라함이 그리 아뢰었던 말씀이다. 세례요한의 멋진 자기표현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그저 그렇게 살다 가는 게 내게 두신 사명이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23).” 들려지고 스쳐 사라져서 더는 흔적도 없이 없어진다 해도, 아이들에게 또는 누구에게 나는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함이라. 비록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고 아이들을 생각하고 저들을 볼 때면 수시고 회의와 갈등이 일어 나를 들들볶지만 그러라고 두신 일이었다.

 

그래서 외쳐 말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심이었다.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11).” 하여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12).”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16-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