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스가랴 13:8-9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편 78:72
2월의 바람은 옷차림에서 봄날이 먼저 온다. 날이 푹해졌다. 겨우내 껴입던 것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여전히 차고 해가 들지 않아 추웠지만, 1월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딸애는 쉬는 동안에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준비하고, 나는 골로새서 3장을 중심으로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하루였다. 어깨가 아파 쩔쩔매면서도 병원을 들락거릴 정도는 아니어서, 가만있으면 괜찮아서 가만있느라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는 날 동안 이러저런 고통은 끊이지 않는가. 이를 통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성품이 있어서이다.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오늘 말씀은 이를 분명히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점점 주의 백성답게 산다. 기독교의 진리는 참 이상하다. 두렵기도 하다. 누군들 이 땅에서 평안과 안락을 바라지 않을까? 잘 되길 빌고 소원하는 바를 구하여 얻기를 바라는 게 종교의 기원이고 신앙의 근본일 텐데 그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이게 다 죄로 인함이다. 나로 사는 일은 하나님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어찌 이 땅에 살면서 위에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성경의 요구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내 안의 요구는 자꾸 ‘성경’과 배치된다. 왜 그런가?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 그러니까, 내가 가진 생명으로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 저의 값으로 산 것이어서 더는 내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안 그런 척 하지만 모두가 종노릇하는 게 세상이다. 법조계에서 문화계로 아니 사회 일반으로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으로 그 실체가 드러날수록 흉물스럽기 이를 데 없다. 서로 존경을 외치고 감싸 떠받들며 위하여 조직을 꾸려가던 인물이, 아니 구조적인 문제가 터져 나오는 셈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린 얼마나 서로의, 사람들의 종으로 살고 있었던가?
그저 그렇게 이 땅에서의 삶으로 전부라면 것도 서로 쉬쉬 하고 살면 그만이겠으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 성경은 나의 특별함을 이렇듯 구별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2-15).”
덧입어야 할 것들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16-17).” 그럴 수 있는 게 택하심 받은 자의 구별된 일이었다.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 사는 일이다.
이는 막연한 게 아니라 구체적이어서 생활 가운데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는 일이다. 어쩌다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해야 하는 일이다. 화딱지가 나다가도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내가 어떻게 주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지, 그럴 자격이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돌아볼 때 더욱 확실해진다.
아,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내 안에 자꾸 이는 온갖 불평과 불만과 원망과 서러움 따위들로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주의 평강이 나의 마음을 주장하시게 해야 한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었구나. 함께 교회를 이뤄가는 일이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이어서 나온다.
첫째,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곧 늘 바라고 먼저 찾아야 하는 게 말씀이었다. 둘째,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응원이 되어야 한다. 셋째,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이를 삶으로, 몸으로, 실제 표정으로 표현하는 삶이다. 넷째,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또한 마음의 일이라, 감사가 늘 그 안에 있었다. 다섯째,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말 그대로 몸에 밴 것이라. 여섯째, ‘그를 힘입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힘입어’, ‘옷 입어’, ‘덧입어’는 모두 같은 맥락의 표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러려면 벗어야 하지 않겠나?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5-10).”
봄날이 오면 제일 먼저 몸이 맞이하는 일은 벗어버리는 일처럼,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나의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나는 인정한다. 안 그런 척 하지만 내 안엔 항상 분함이 노여움과 함께 엉겨있다. 이는 악의적으로 남을 비방하는 말로 나타난다. 누구의 허물을 마주할 때면 저를 비난하고 판단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안 그런 척, 고상을 떠느라 아첨과 거짓 인사가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는 이 땅에 맺힌 소욕 때문이다. 그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이는 모두 육체의 일이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돌아볼 때 아찔하였던 순간들이다. 그때야 그게 즐거움인 줄 알고 회포를 풀듯이 서로 모이면 부끄러운 줄 몰랐었던 것인데.
아, 그렇지. 이젠 전혀 다른 세상을 산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이 땅에 있으나 이 땅에 속한 게 아니라는 사실 앞에 안도한다. 그러니 다가올 세상을 위하여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또한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8).” 그러므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 하시는 말씀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오래 되새겨 그 의미에 충만하였다. ‘~를 죽이라.’ ‘~을 벗어버리라.’ ‘~을 더하라.’ 그러니 이런 게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는 데서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이다. ‘믿고 구원 받았다’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과도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마침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어서, 저들 선수도 고작 그 하찮은 듯한 경기 하나를 위해서도 저처럼 젊음을 다하고 자신의 모든 꿈과 열정을 향해 피땀을 흘리며 반복하고 또 되풀이 하였을 그 수고와 애씀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찬 일이다. 500미터 스피드스케이팅 은메달을 따고, 태극기를 흔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대는 선수의 모습을 보며 덩달아 울컥하는 것도 그 결실을 위해 남모르게 갉고 닦았을 피나는 노력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산다는 것, 이 ‘땅에 있는 육체를 죽이는 일’이 그리 간단할 것이겠나?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는 일’이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도저히 정이 안 가는데 ‘사랑을 더하는 일’이 어디 가능한 일이겠나? 정말이지 그 수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말 못할 수모와 어려운 결정과 숱한 부딪침과 볶임과 능멸과 소외와 갈등과 하루에도 열두 번씩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끊임없는 요구와 본능을 전면으로 맞서야 하는 일이던가?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나? 싶은. 하다못해 이 땅에서의 영광을 위해서도 저처럼 피땀 흘려 온 맘과 온 정성을 다해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을 일인데, 하물며! 그래서 성경은 단호하게 외치는 것이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6).” 아니면, 그냥 내버려두면 이와 같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우리 영혼을 끝내 죽일 테니까 말이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려 들 것이다. 최소한 나의 삼분의 이는 다 죽어야 한다. 남은 삼분의 일로도 연단이 아니고는 금 같이 될 수 없다.
오늘 말씀이 그렇게 읽힌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8-9).” 비로소 나는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기까지.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주께서 나를 지도하심이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38-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