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예수라 하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1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84:10-11
이름을 예수라 하라.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1-22).” 교회를 주의 몸으로 일컫는 데는 우리의 하나 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한 성령이 행하신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11).” 각각 그 쓰임과 모양은 다르나,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4)” 그 직분도 사역도 다르지만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6)” 결국은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7).”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라면 끝내 애써 이루어야 할 일이 서로가 하나 됨이겠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막연하게 그냥 수동적으로 있을 문제가 아닌 것이어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산다는 일은 힘써 지키는 삶으로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행하는 것이었다. 그 일은 첫째, 은혜의 분량대로 사는 일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
둘째, 주께 사로잡혀 사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8).” 죄로 인하여 세상에 사로잡혔던 나를 주께서 도로 사로잡으셨다. 셋째,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12).” 오늘 말씀은 이를 선포하신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자라가라는 것.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골 2:2).” 우리에게 두신 믿음은 역사에 따른 것이니,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3).” 하나 된 자들은 화목하라는 게 명령이다.
도저히 화목할 수 없는 세상에서, 서로는 ‘본의 아니게’라고 하지만 실은 그게 다 본의여서 황망하다. 요구가 많고 충동적인 사회가 되었다. 유약한데 스스로 이를 감추려고 하니까 말이다. 발끈하며 화를 잘 내는 성향이고, 차를 급하게 몰고, 가치 없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변덕스럽고, 빨리 먹고, 낭비가 심하고, 이성에게 집적거리고, 정작 중요한 문제는 뒤로 미루면서 이내 충동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는 지엽적인 문제도 아니고 민족성 때문도 아니다. 자신에게 정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17).” 역사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하여 주일 날 말씀을 나누면서도, 실은 이 모든 게 사실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데서 놀라웠다.
신화가 아니다. 뜬구름 잡는 상상의 나래가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 역사는 시작되었고 그 이야기는 이어져 오늘에 이르러 나의 이야기로 기록되고 있었다. 실망이 앞서고 낙심이 나를 짓누르고는 하지만 그럴 때면 노아를 생각하고 아브라함을 바라본다. 모세와 다윗의 행적을 묵상한다. 저들의 곤고한 삶이 되레 위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처럼 견뎌냈을, 힘써 지켰을 믿음에 대한 역사였다. 막연함과의 싸움이고 끝 모를 남은 이야기와의 싸움이었다.
교회라. 주가 세우셨다. 이와 같은 기본 명제를 기준으로 하여, 막연하여서 나는 종종 휘청거리다가도 저들 곧 믿음의 역사를 묵상한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22).” 얼마나 황당한가? 말도 되지 않는다. 답답하다. 어떻게 하면 누구를 주 앞에 나오게 할 수 있을까? 내 안에 이는 갈망은 조바심을 치고 이내 초조함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나는 누구를 생각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나를 생각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거였다. 글방에서 교회로 같이 시작하게 하신 아이들을 열거하며 주께 아뢸 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나는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사실의 증거다.
내가 주께 사로잡혀 주의 성전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 줄이야! 어디에 있든, 지금은 무얼 하고 주를 외면하고 살든,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주가 계신다.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끝끝내 나와 함께 하셨던 이가 한 번이라도 이 성전을 밟고 지나간 아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을. 때론 더디고 때론 묘연하여서 가당치도 않은 일 같으나, 나는 이제 확신한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다시는 주 없이 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내가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차라리 외면당하고 소외된 채 남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주밖에 나의 마음을 알아줄 리도 없고,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나로 하여금 ‘정직하게 행하는 자’로 삼으실 것이다. 결국은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마 1:22).” 그러기 위하여 주는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경외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2).” 내가 이제 주께 피하였으니 복된 것이어서, 여전히 그렇지 못한 이를 생각하고 아이들을 주께 아뢰며 곁에 두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나에게 이와 같은 사명을 맡기심은,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8:2).”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가게 하심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참 어지러운 세상에서 더는 사람의 속임과 간사한 유혹과 온갖 교훈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 그러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 성령이 나로 교회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
교회의 하나 되게 하심은 저들로 주를 마주할 수 있게 하는 사명자로 세우심이다. 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 내 안에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심이 지켜져야 할 것들이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일이었다. 안 그러면 자칫 사람의 속임수에 넘어가기 일쑤다. 저들의 교훈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기 때문이다. 간사한 유혹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므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
교회의 머리이신,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6).” 주가 이루신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17).” 집 안을 꾸미고, 가치 없는 어린아이 적의 장난감에 환장을 하며, 새로운 놀이를 좇고, 같이 할 동무를 찾아 배회하고, 나와 같이 놀아주지 않으면 내 편이 아니어서 모두가 졸지에 적으로 내몰리는 세상이다. 얼마나 충동적인 세상을 살고 있는지.
그러나 이제,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나는 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 비록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6).” 곧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