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전봉석 2018. 2. 27. 07:26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태복음 2:10-11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편 85:10-11

 

 

 

어릴 때 어느 성탄절 날 오늘 본문을 암송하여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였던 일이 있다. ‘그들이 잃었던 별을 다시 만나 기뻐하였다’는 데서 어린 마음에도 크게 안도하였던 생각이 난다. 큰일 날 뻔했다면서, 저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준비하여 갔던 선물을 무사히 드릴 수 있었던 장면에서는 울컥,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또한 이 본문을 가지고 성극을 했었다. 그때는 내가 헤롯이 되어 동방박사 세 사람을 만났었고, 저들에게 속은 걸 알고 두 살 미만의 아이를 모조리 죽이라 할 때는 소름이 돋기도 했었다.

 

그런 거 보면 나는 각별한 아이로 자랐던 것 같다. 그것이 나를 응석받이로 자라게 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로 성장하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보면 늘 누가 어떻게 볼까, 또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언제나 강했던 것 같다. 그것으로 더 주를 바라는 모습의 아이로 성장하게 하기도 했다. 나의 유약함의 근원이 겉으로는 늘 착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랑받는 아이로 내몰곤 하였다.

 

어쩌면 그것이 청소년 시기를 지나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크고 화려한 헤롯의 왕궁만 보고 아기 예수를 만나려고 그리고 갔던 동방 박사들처럼 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저러한 끔찍하고 잔인한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다시 돌아섰을 때 마주할 수 있었던 별빛으로 안도하였다. 이제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내가 준비하여 간 것을 주 앞에 내어놓는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마땅히 개발해야 할 성품들이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무엇에든지’라고 한정을 제한하지 않는 표현이 진리다. 어떤 조건이 맞아서 또는 여건과 상황이 되어서가 아니라, ‘어떠하든지’의 범주처럼 활짝 열린 공간을 나타낸다.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고, 그러므로 ‘무슨’ 덕이 있고, 기림이 있든지 ‘이것을 생각하라.’ 이것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나의 관용은 이루어낸 성품을 말한다. 그러한 관용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별이 나타났다. 동방 박사들이 기뻐한다. 보이는 화려한 왕궁에 쏠려 그럴 것이라는 상식으로 그저 막연히 추구하였던 것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 기쁨이다. 이 기쁨으로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으로까지 흘러나게 해야 하는 ‘관용’이다. 그러고 보니 내 곁에 그와 유사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름 열심을 다해 가난을 극복하고 신앙을 추구하며 교회에서 열심을 다하던 선생과 저는 개신교인지 천주교인지 알 수 없으나 남다른 넉넉한 품성으로 사람들에게 존경 받던 의사 내외와 어느 기업 사장 부인과 뜻을 같이 하는 무리가 있었다.

 

굳이 나는 어려서 보고 좇았던 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불빛이 협소하고 지엽적으로만 느껴졌다. 사람들은 모든 걸 포용했다. 그들 안에서는 종교적인 정치적인 어떤 사상과 진리의 떼거리가 필요 없었다. 사람이 좋아 사람으로 뭉친 것이라, 그들과 어울리던 동안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가장 옹색하였다. 점점 그들 속으로 들어가 어느 순간 나 역시 저들 가운데 한 인물을 차지하면서 그 추태와 더러움과 온갖 비방과 쾌락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한데 어울리는 유희에 넋이 나갔다. 한편으론 추하고 부끄러웠다.

 

한 별을 보고 좇아가는 삶이란 그러기까지 고독하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내 하나님의 영광은 아기 예수가 계신 곳으로 인도하신다. 저의 십자가의 부활만이 주님께 영광이 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나는 저들 무리 가운데 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낯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

 

오늘 날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이 오래된 종기를 짜내듯 추하고 더럽고 고통스럽다. 저명한 인사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임에도 경악을 금치 못하겠는데, 하물며 누구라고 할 것 같이 다 마찬가지였다는 데서 염치가 없다. 어느 댓글에서 한 여성이 썼던 내용 중에 ‘이 시대를 사는 여성들로서 한 번이라도 성추행을 당하지 않고 살았던 이가 과연 있을까?’ 하고 되묻는 말이 의미심장했다.

 

하나님 없이, 별빛 없이 사는 삶이란 게 얼마나 끔찍하고 처절한지 나는 익히 잘 안다. 오죽하니 한 친구가 같이 ‘우리 모임’에 놀러왔다가 다음에 만났을 때, 꼭 인류가 멸망하기 하루 전날에들 그러고 놀 것 같더라, 하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한참 그 무리에 있을 때야 그 말이 무슨 말인가 내가 알기나 했던가. 다들 훌륭하여 모 기업 사장 부인에 어느 대학병원 내과 과장부부에 한 언론사 기자에 교수에 작가에 나름 내로라하는 사람은 다 모였던 그룹이라 저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도 나의 존재감은 충분하다고 여겼으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과연 어찌 되었을까? 은혜로써만이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나의 수고로는 이룰 수 없다는 데 확신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내 안은 악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누구도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없다. 우리의 교육은 결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할 수 없다. 강압적이거나 유약하거나, 깎아 세우거나 내버려두거나, 나름 열심을 다하거나 방임하거나, 많이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결국은 그 부모의 됨됨이가 평생을 자기 자신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따라다니는 법이어서, 스스로에게도 부모 역할을 하고 그런 모순된 억압과 또는 나약함과, 변덕스러움과 또는 뻔뻔함이, 지극히 감정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나를 휘두르는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본래 우리는 악하다. 스스로 새 옷을 입힌다고 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에 나를 이처럼 말씀 앞에 불러 세우신 것은 전적으로 성령이 이루신 업적이다. 내가 수고하여 주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이 당연한 원리를 알 것 같다. 섞일 수 없다. 나의 관용과 주의 성품이 교회 안에서 밖으로 흘러넘칠 수 있는 것이지 교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혼자 들어앉아 뭘 하고 있는 걸까? 하고 회의가 들다가도 저들처럼 바깥을 배회하던 때를 떠올리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럴 수 있기까지 밟아야 할 단계가 있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8).” 여전하여서 나의 저렴한 표현과 생각과 온갖 유혹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툭, 하면 원망이다. 누굴 탓한다. 상스러운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싸구려 생각들뿐이다. 이를 벗어버리라. 말씀은 나를 격려하시는 것이다.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내 안에 여전히 쌓여 있는 온갖 더러움의 실체다.

 

그러므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와 같은 말씀이 뒤따른다(9). 얼마나 거짓이 능숙한지 때론 내가 나를 속이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제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10).” 그렇다면 그런 것처럼 행실이 말이 생각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자로 내게 권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성령이 나도 이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내가 한참 저들 무리와 어울릴 때 저들 중 하나 된 것을 힘써 지키려 그리 바동거리듯 어울리고 같이 돌아치던 때를 생각나게 한다. 그럼에도 저들은 항상 나를 남다르게 봤다. 종종 알 수 없는 신비 가운데 하나다. 나는 저들 속에서 예외였던 것이다.

 

돌아보면 그게 또한 내 안에서도 늘 일던 것이니, 즐거워하면서도 석연치가 않은 것이다. 같이 어울려 정신없이 좋아라하고 지내면서도 어딘가 싫은 거였다. 어떤 역겨움, 또는 환멸과 같은. 아!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신 것이었다. 하물며 오늘 이처럼 주 앞에 두신 가운데서야 지당하고 합당한 말씀이어서,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0-11).” 이를 알기까지 알게 하시려고!

 

아,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8).” 더는 내가 나로 인하여 길을 잃지 않게 하시려고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9).” 곧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