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선포되리로다

전봉석 2018. 3. 6. 07:19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태복음 9:35-36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편 92:15

 

 

 

사람 참 악하다. 추하고 더럽다. 거짓되고 위선적이다. 다음 대선주자로 유력하였던 이가 성폭력을 일삼았다는 폭로가 나오고, 저는 합의에 의한 것이지 폭력은 아니었다고 발뺌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서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는 그가 마치 정의로운 이 시대의 지도자인 척 사람들을 현혹하는 말로 그 행실을 꾸미고 살아왔을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 정도일 수 있지? 싶은,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거짓과 위선을 낱낱이 보고 있는 셈이다.

 

덮어놓고 쉬쉬 하며 지내는 것을 선호하는 이들의 안하무인격인 자기주장들이 이해가 간다. 다 그렇지 뭐, 하고 서로 발뺌하는 어른 같지 않은 어른들에게 왜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지 알겠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어린아이들은 마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존재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어린아이로 오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품으시고 축복하셨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오늘 날 이 시대의 어른들이라는 위인들이 그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추하고 부끄러운 현실을 보면서 저들의 상실된 어린아이 시절을 떠올려본다. 예수님은 이방 여인의 어린아이도 고쳐주셨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우리가 늘 가정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는 제목은 안 믿는 가정에서 안 믿는 부모들 밑에서 자라는, 우리에게 보내시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출세와 성공을 목표로 삼으면서 가정은 와해되고 붕괴 되었다. 부모 자식 간에 반목하며, 부부사이는 대적하고, 부모들은 우유부단하며 강압적이고 유약하며 방임하고 저마다 지위와 의무를 포기하였다. 그저 잘 사는, 보다 나은 실력자로 길러내는 데 혈안이 돼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부정을 일삼는다. 허위로 서류를 꾸미고 얼렁뚱땅 그렇다고 하면서 서로가 쉬쉬 그저 눈감아주는 관용을 사회의 미덕으로 삼더니만. 이래저래 주목 받고 존경 받는 이들이 저 모양인데 말해봐야 소용도 없는 곳은 오죽이나 할까?

 

그래서 성경은 단호하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그러다 보면 알게 모르게 무뎌지고 흩어져서 무엇이 정작 진리인지, 구원의 방주인지 그 의미는 모호해지는 것이다. 모든 다툼의 씨앗이기도 하다. 이 비밀이 크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우리가 저들보다 월등히 선하고 의로운 자여서가 아니라 우리는 최소한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할 줄 안다.

 

사람이 보고 안 보고, 누가 있고 없고를 떠나 이 모든 상황과 처지가 하나님 앞이라는 데서 그 경외함으로 주를 바라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 뉴스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지지하던 이가 그처럼 앞뒤가 다를 줄이야!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나와 인터뷰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그만큼의 실망이었고 낙심이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상주시는 이시면 벌주시는 이시기도 하다.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나의 연약함에 진저리 친다는 소리다. 나의 위선과 아집을 잘 아는 까닭에도 함부로 누굴 겨누어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오늘 우리 사회의 이렇듯 까발려짐은 지극히 크신 이를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곧 나 역시 아닐 수 없고, 나 또한 다를 바 없고, 그래서 저들의 민낯을 볼 때면 내가 더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믿는 나에게 베푸신 능력이 나의 한없는 연약함을 인정하게 하신다는 것. 여전히 위선적으로 내 안에 득시글거리는 죄악들로 몸부림칠 수 있게 하신다는 것. 지난 날 나의 부끄러움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게 하심으로.

 

그렇지. 그래서 교회여야 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3).”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곳.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 몸이 허튼 데 기웃거릴 때, ‘오직 사랑 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5).”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소망인 것은 어쨌든 자라간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6).”

     

오늘 날 우리 어른들의 망령된 짓을 보면서 어린아이들의 눈치를 먼저 살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흉내 내고 어른들의 상술에 휘둘려 멋모르고 흡수하고 빨아들이는 아이들을 두고 우리는 기도한다. 마음을 기울이고 어떻게든 교회로 인도하길 간구한다. 종종 어른성도를 운운하며 교회 형편을 걱정하는 이들이 있는데, 주님은 어린아이의 보리떡과 물고기로 사람들을 먹이셨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요 6:9-10).”

 

어느 지사의 성폭력 사례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길 것이다. 서로가 믿던 사람에 대한 신의를 한 방에 무너뜨리는 예가 되었다. 저는 어질고 올곧고 국민을 위해 오직 나라를 위해 저 한 몸을 불사르는 위인인 줄 알았다. 한 점 부끄러운 게 없다던 전직 대통령은 오늘 내일 검찰에 불려갈 일만 남았고, 서로 앙앙거리며 마치 자신들은 깨끗한 척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조심 또 조심한다.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모두가 병들었고 모두는 약하다. 이를 숨기고 또는 부정하느라 기를 쓰고 살면서 거짓을 일삼는 이 땅에 오늘도 주님은 찾아오신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5-36).” 단지 저 시대만의 일이겠나?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이와 같은 부패와 부정과 온갖 더러움을 통해,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 92:15).”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아무 꾸밈도 어떤 위선이나 정치적인 목적도 없이 아이들은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쳐부를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21:15).” 허튼 짓이라고 여겨 노하는 이들이 정작 우리 사회의 어른들 아니었던가? 덕망 높은 교수요, 시인이요, 정치가요, 자상한 줄 알았던 아버지요, 의로운 선배요, 어른인 줄 알았는데!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16).”

 

저 어린아이들이 살아서 이내 어른이 되어야 할 이 땅에 대해서 나는 두려워한다. 방임과 유약과 억압과 강압이 판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또 똑같이 우리와 같은 어른이 되어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우리 시대란,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막 13:12).” 더는 소망이 없음을. 아무리 생각해도 어찌 가망이 없는 일이어서. 오직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모르겠다. 나는 요즘 일련의 사태를 보며 오히려 두려워서 주께 영광 돌린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9:8).” 그러므로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 92:1-3).” 이처럼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내게 알리시는 주님께 영광을.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으로 평안히 잠들 수 있게 하심에 감사를.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4).” 곧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12).”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13-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