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열왕기상 1:5-10 / 스스로 높여서

전봉석 2018. 3. 9. 13:24

20180311 주일

 

 

열왕기상 1:5-10

스스로 높여서

 

 

 

1:5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1: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1: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1: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1: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1: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들어가는 말

 

다윗 왕이 늙었다. 시종들이 수넴 여자 아비삭을 데려와 왕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때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내가 왕이 되리라하였다. 저는 자기를 위해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였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였다. 용모가 심히 준수하였다. 그의 아버지 다윗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하고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저와 모의하여 그들도 아도니야를 따랐다. 요압은 다윗의 군사령관이었다. 그러나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를 따르지 않았다.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청하였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않았다.

 

나단 선지자가 이를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알렸다. 밧세바가 왕께 나아가 고하였다. 이어 나단이 들어가 왕 앞에 이와 같은 상황을 알리었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일렀다.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이에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부르고 그리 명하였다.

 

저들은 솔로몬을 다윗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해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이에 뿔 나팔을 불고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지명하였다.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 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의 왕위를 내 주 다윗 왕의 왕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아도니야와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먹기를 마칠 때 큰 소리가 들렸다. 요압도 뿔 나팔 소리를 듣고, “어찌하여 성읍 중에서 소리가 요란하냐?” 하고 물었다.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아뢰었다. “다윗 왕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셨나이다.” 아도니야와 함께 한 손님들이 놀라서 도망쳤다. 아도니야도 두려워하며 도망쳐서 제단 뿔을 잡았다. 저의 왕위는 자작극으로 그렇게 하루 동안의 풍월이 되었다.

 

스스로 높여

 

아노니야는 서열상 압살롬의 다음이었으니 스스로 높여왕이 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하루 동안의 풍월이었지만, 그럴 때면 또 이상하게도 저를 따르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요압과 아비아달이 그 인물들이다. 여태 저들은 다윗의 충복으로 하나는 군사령관이었고 하나는 제사장이었다. 한데 다윗 왕이 늙었다는 데서 저들의 판단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기보다 자신들의 생각을 먼저 취하였다.

 

성경의 이치는 명료하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29:23).” 스스로 높이고자 하면 낮추신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11).”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느 시대마다 스스로 높여 극적인 자기숭배를 연출하는 법이라. 욜로족(You only Live once, YOLO)이 근사한 것이고, 커밍아웃이 존재감을 높이는 것이다.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이 하와의 선악과를 받아먹은 이유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4:10).”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를 먼저 붙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자기를 위해

 

아도니야는 자기를 위하여 보병과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였다.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미투(Me Too) 운동과도 관련하여서 보면 스스로를 높이던 자는 영락없이 허물어지게 돼 있다. 자기를 위하여 캠프를 만들었고 사단을 구성하였으며 추종세력들을 주축으로 어떤 일을 도모하는 데 열과 성의를 다하였다. 저들은 자신이 내세우고 지켜왔던 가치와 기준에서 스스로 모순되는 행위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악의 씨앗은 무엇일까? 오늘 본문은 저를 빗대어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고 묘사하였다. 즉 좋은 조건과 타고난 실력과 어떤 좋은 배경 따위의 것들이 실은 저를 망치는 발판이 될 위험요소가 충분하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4:1).” 그런 날은 기필코, 반드시 이른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처럼 살라고 하셨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6:48).” 그렇지 않으면 어떤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49).” 이에 말라기서에서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4:2).” 그 원동력이 스스로 높여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경외함이었다.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오늘 말씀 6절을 보면,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버지 다윗의 방임은 그야말로 저를 응석받이로 자라게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알아서 잘 자라는 자식은 없다. 저절로 고집을 꺾고 순종하는 자식은 없다. 성경은 가차 없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13:24).” 성경의 교육법은 분명하다.

 

마치 인격적으로 키운다는 말로 부모의 유약함을 감추고,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으로 자신들의 방임을 포장하려 든다. 성경은 일갈한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29:17).” 이에 그 기준도 분명하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6:4).” 그것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써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고, 이는 먼저 자신이 주를 경외함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7).” 참 신기하게도 꼭 이런 세력이 있다. 동조하고 힘을 실어 맹신적으로 굴복하고 굴종하는 자들 말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성경의 이와 같은 말씀은 너무 단호하신 것 같다. 한데 허투루 보아서는 영락없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은연중에도 병이 전염되는 것이지 건강이 전염되는 게 아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저들을 답습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요압과 아비아달의 모의는 충분히 그럴 수는 있었겠으나, 바울 사도의 경계를 다시 한 번 주목해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를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다.

 

 

나오는 말

 

아도니야의 깜냥이 참 그렇다.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왕상 2:17).” 저는 제단뿔을 잡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솔로몬 왕의 모친 밧세바를 찾아가 청한 것이 가관이라. 다윗이 늙어 그 기력을 다하지 못할 때 곁에 두어 시중 들게 하였던 후궁 아비삭을 달라는 것이다. 고작 그 정도의 인물이 스스로 높여,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고 왕이 되었다!

 

이에 밧세바가 왕께 청을 넣었다고 저는 죽음을 당하였다. 솔로몬 왕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25).” 조금은 황당하고 답답한 노릇이라. 우리는 얼마나 위선적이며 수준 낮은 위인들인가! 나름 진보를 외치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으며, 것도 그날에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며 너스레를 떨던 위인이 알고 봤더니 성폭행의 주범이라. 저들의 고상한 말솜씨와 위풍당당한 자기합리가 가소롭다. 우리는 오늘 아도니야의 하루 동안의 풍월을 보며 오히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자.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