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13:9, 13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편 96:13
곧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말씀을 우리에게 주심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우리는 얼마나 유약하고 보잘것없으며 허망한 존재인지. 기어이 누구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였고, 나는 저의 남겨진 가족을 생각하다 헛헛하였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니. 성경으로 말씀하시다 일련의 사건사고를 들어 그 의미를 구체화시키시는 것 같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7).” 이 은혜의 시대에 살면서 그 값어치를 바로 구하는 삶이 천국을 더욱 소유하는 길이겠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2).”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던 삶에서 돌이켜 이처럼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게 값진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그리 들려주신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9, 13).” 묵상이란 그 가운데 묻히는 것. 그 의미를 오래도록 되씹고 눈여겨보고 귀담아 듣는 것.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 96:13).” 모른 게 혼재된 땅에서 바른 진리를 붙들고 깨달아 앎으로 더욱 간절히 바라며 살 수 있다는 게 은총이겠다. 나에게 더하시는 긍휼하심이 귀하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느라, 그 맥을 끊지 않으려고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자 아내가 주먹밥을 들고 왔다. 같이 컵라면에 주먹밥을 몇 개 집어먹었다. 새로 얻은 치료약을 먹고 원고를 마무리하는데 현기증과 어지럼증이 일었다. 덜컥 겁이 날 정도로 몸의 반응이 이상했다. 약사아이에게 물었더니 약물에 대한 부작용일 수도 있다고 했다. 원고를 마무리하고 소파에 누워 마음과 몸을 달랬다. 어떤 불안이 더욱 엄습하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한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 같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두려움에 나는 연신 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의사는 부작용에 대해 미리 말해주지 않았던가 보다. 약사아이는 삼사일만 좀 참아보자고 하였다. 안되겠어서 안정제를 한 알 더 삼키고 눈을 감았다. 컵라면과 급하게 주먹밥을 먹어서 위경련이 온 것인지, 말 그대로 약물에 따른 부작용일지. 두어 시간을 더 지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의 두려움은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게 새삼 든든하였다.
성경은 누누이 일러 ‘어떠하든지’의 상황에 대비하게 하신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그렇지. 바로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심이다. 그러니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5-6).” 이 모든 게 궁극적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다.
그 와중에 설교원고를 뽑고 주보를 만들고 혹시 몰라 예배에 지장이 없을 것들을 먼저 준비하고 있으면서, 조금 우습지만 죽음을 생각하였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의 밑바탕을 이제는 잘 알겠다. 참 나의 하나님은 시의적절하시다. 그리고 들고 읽은 책이 어제 새로 구입한 톰 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이다. 앞에 부분에서 죽음에 대하여,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해 세계 각국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바라고 구하는 게 다르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오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혼자 불안에 떨었고 몸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으며 나는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휘말렸고 그래서 더욱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리고 누가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사람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생각하며 헛헛해하였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2).” 이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내 안에 뿌려진 천국에 대한 증거다.
단지 주워듣고 그런가, 하는 의구심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성경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 나의 온 맘이 기울게 하려 하심이고, 이를 통하여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난리와 난리 소문과 소문에 부화뇌동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이야기는 본보기가 되고 말세를 사는 나를 깨우치려 하심이다.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이 또 여건이 온전히 주를 바라고 섬기게 하려 하심인 것을,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그리 행하였다. 심지어 바울 사도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였으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내가 사는 이 모든 날들이 주 앞에서만 유용한 것이었으면. 이제 나의 남은 생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이었으면 좋겠는데.
복이란,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그리고 들려주시는 주의 말씀이 안성맞춤이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19).” 기껏 들어도 들은 걸 알지 못할 때 그걸 얼른 빼앗아가는 자가 있었다. 또한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0-21).” 현실이 녹록하지 않아 시달리다 말씀의 뿌리가 없어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2).” 너무 많은 생각과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사는 자의 삶이란 게 스스로 복음의 씨앗을 싹틔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구나. 그러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23).” 저는 곧 날마다 경작하는 자이다. 모든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니, 부지런함은 성실함의 기초이다.
나는 내가 어렵다. 내 몸이 어렵고 내 마음이 어렵다. 내 생활이 어렵고 추구하는 바가 어렵다. 어려워서 어려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됨이란 어떤 것일까?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내 안에 이는 풍성함은 거저 주어진 것이나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하시려는 것.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 같은 것(33). 어느새 내 안에서 불어나고 불어나서 나를 가득 채우는 것.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44).” 내 모든 걸 팔아 그 값으로 사는 것이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45-46).” 그 값을 안 이상 다른 모든 것으로 그 하나를 얻고자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 안에 온전치 못한 것을 내버리고 좋은 것으로 그릇을 가득 담고 싶은,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47-48).” 전에 취하였던 것이 거추장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없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52).”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허튼 게 없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이 그 의미이겠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어떤 불안이 또 몸의 반응이 나를 어렵게 하여 안정제를 삼키고 가만히 주를 바라고는 한다. 어떻게 어려움이 엄습할 때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을 마감하고 떠나는 이의 홀가분함을 생각하기도 한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시기를. 또한 새 힘을 주사 능히 이겨낼 수 있게 하실 것을.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시 96:3).” 내게 맡기신 이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시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4-5).”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8).”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