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전봉석 2018. 3. 11. 07:22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태복음 14:33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시편 97:11

 

 

 

경배와 찬송은 험한 시험 물속에서, ‘배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특권인 것 같다.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실 때 모두가 유령인가 하여 두려워하였으나, 주님인 것을 알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할 수 있던 믿음은 밤새 시달린 물살 덕분이겠다. 비록 금세 또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속에 빠졌고, ‘믿음이 작은 자여’ 하는 꾸지람을 듣기는 했어도 말이다. 주님과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쳤다(마 14:27-32).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33).”

 

어려움이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을 더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넉넉할 때는 알 수 없는 비밀한 마음이다. 이는 주께서 뿌리시는 빛의 마음이 아닐까?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1).” 누구를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께 아뢰게 되는 마음이 실은 내가 작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어서, ‘배에 있는 사람들’ 특권인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에서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 시편의 말씀은 그 의미를 확실히 알게 하는 것 같다. 내가 누구를 이끌어 주 앞에 나오게 할 수는 없어도 주와 함께 하는 것을, 그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어떠한지 직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삶이기는 하다. 이 모든 말씀의 기록은 그런 의미에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저들 제자들의 시달림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 사람이 얼마나 허망한지, 그 삶이란 게 얼마나 덧없음인지. 주께서 붙드시고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음이 대해, 오늘 우리 사회는 거듭 그 말을 들려주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높이는 자기숭배의 시대를 살면서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를 일련의 사회사건은 날마다 말해주고 있었다. 누구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나는 저의 남겨진 가족을 생각하며 마음이 자주 흔들거렸다. 모래 위에 쌓은 집의 허술함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뒤에나 증명이 되는 셈이다. 또 누가 정치를 떠나고 누구는 쉬쉬 하며 서로를 입막음하려 기를 쓴다. 과연 어떤 인생인들 완전할 수 있겠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주를 알고 이 말씀에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게 복이었다.

 

스스로를 높여서는 어림없는 일이겠다. 다윗의 아들들의 기구한 삶을 읽으면서도 우리네 사람들의 그릇됨을 한꺼번에 축약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복누이 다말을 흠모하였던 암논의 변덕과 그 어리석음에 대하여.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의 치밀한 음모와 보복의 날들을 통하여. 이어지는 아도니야의 황당무계한 일일 풍월의 어처구니없음을 보면서.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그런 것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그런 데 따른 삶의 원리 앞에 말씀은 분명히 이르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어쩌면 스스로 높여 자신을 경배하는 데는 못미더워서, 알 수 없는 게 세상이라, 어떻게든 자신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어쩌면 우리는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성경은 강하게 다스리시는 것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그렇지 않으면 금세 또 바람에 놀라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언제든 넘어질 수 있고 물에 빠져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무던히 무심토록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할 수 있는 것. 스스로 위로를 찾고 위안을 얻으려 들지 않고 묵묵히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일.

 

이를 늘 바라고 구하지만 수시로 이는 바람에 나는 또 금세 두려워 물에 빠진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 14:31-32).” 주와 함께 배에 오르는 일. 비로소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33).” 그 경배와 찬송이 우연히 뚝딱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불같은 날이 이를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동일인물이다. 악을 행함으로 교만한 것이고 교만하여서 악을 행하는 것이겠으니, 저들은 다 지푸라기 같을 뿐이다. 바람에 나는 겨와도 같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 1:4).” 그와 다르게 나는 든든하여서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 그럴 수 있는 힘은 말씀을 묵상하는 데 있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

 

온통 나라가 두 패로 갈려 이쪽이거나 저쪽에 서서 자기들 주장에 빠져드는 꼴이다. 그런데 보면 다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작 저가 맞는지, 다른 이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선생이 하루아침에 추락하여 교과서에까지 실렸던 영예가 그 노년에 이 무슨 수모인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기논리에 빠져 잘못은 저질렀으나 잘못한 게 없다는 논리이니까, 염치가 없기는 참 뻔뻔스럽기만 하다.

 

그러게. 실수 안 하고 사는 이가 누가 있겠나만 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모든 걸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려운 일인가보다. 저마다 자기 방어권을 행사하고 변호사를 꾸려 어떻게든 벌을 면하거나 축소하려 드느라, 서로에게 2차 피해는 피할 수 없는 일인 것도 같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추이는 ‘스스로 높여’, ‘자기를 위하여’ 그리 행하였던 ‘아도니야의 방식’이 아니겠나. 설교문을 다시 읽어보며 그리 생각하였다.

 

그야말로 깜냥이 그것밖에 안 되는 위인이어서 고작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에서도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왕상 2:17).”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을 정도로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에겐 뉘우침이란 DNA는 없는 것일까? 그런 속성은 위선과 아집으로 뒤섞여 모양만 남은 것일까?

 

성관계는 있었으나 강제는 없었다고 하니, 또는 누구는 기억조차 없다고 하여 되레 더 큰 모멸감을 안겨주기도 하면서, 참으로 가관이다. 사람의 한계와 본질을 보는 것 같다. 딸애가 점심을 사주어서 식당에 들어갔다가 옆 테이블의 한 노인이 열변을 토하듯 이 정부의 무능을 탓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사람으로 사는 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다들 저마다의 판단과 기준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자신을 스스로 높여 자기를 위하여 방어하거나 선제공격을 한다. 말과 말들이 무성한 사회가 되었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그 가운데서도 구별된 자들을 본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33).” 그 배에는 예수께서 함께 오셨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32).” 비로소 바람이 그쳤다. 우리가 이런저런 말들의 바람에, 판단과 비난의 바람에 휘둘려 다니지 않는 비결을 보여준다. 예수와 함께 배에 올라야 한다. 그때 배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함으로 주만 우러르며 경배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명의 대통령이 구속될 위기에 놓인, 이 나라의 불운한 역사를 눈여겨보면서 여전히 나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대 앞에 의연할 수 있는 길. 누구를 지지하고 저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얼마나 허망하고 덧없는 일인가를, 우리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여주고 또 알려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되풀이 되는 이 비극의 순환 구조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주와 함께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쳤다.’

 

비로소 배에 있는 자들이 절하고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다. 곧 의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별하심에 대해 갈망한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1).” 주일 날 아침, 또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떠오르는 아이들의 얼굴을 그 사정과 그럴 수밖에 없는 저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주께 구한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이 모진 광풍의 나날들 속에서 부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는 주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곧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부디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