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한결같으시고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 19:16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편 102:27
스스로 선해질 수 없다. 어떤 수고를 더한다 해도 나는 선을 이룰 수 없다. 선을 행함과 영생을 얻는 것은 별개다. 영생의 결실이 선행일 수 있으나 선행의 결과가 영생일 수는 없다. 한 청년이 주께 와서 물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오늘 본문은 저의 시작점이 그릇된 것을 일깨우신다. 예수님은 당돌한 저의 질문에 되물으셨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무엇을 하여 자신이 선을 이룰 수 있다는 관점은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저의 취지는 선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러자 청년은 되묻는다.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님은 가장 기본적인 계명을 말씀하신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청년은 자신 있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저가 생각하는 계명은 스스로 노력하여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여긴 것이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그리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것이었다. 한데 저가 정작 알지 못했던 것은 ‘나를 따르라.’는 것으로 이는 자신을 부인하는 일로써,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까 순간 얼굴이 화끈거린다. 과연 나는 나를 내어주고 주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 유난히 일이 많은 하루였다. 이런저런 일련의 상황들 속에서 나는 참 내가 괴물 같을 때가 있다. 전엔 나도 청년처럼 나를 여기며 살았다. 내가 이만하면 됐지, 뭘 더 잘해야 하나? 싶은 심정으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내 것을 내어놓을 수는 없었다. 주를 따른다는 것은 나의 주권을 포기하는 일이라는 걸 몰랐다. 내 주장을 우선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반문하려 들면,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5).” 주님이 날 위해 그리 하셨던 것을 성경은 일깨운다. 그리고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하신다. 그러자면 내가 나를 주장하면 안 될 것인데, 안 그러고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곤욕스럽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
자신을 다 포기하시면서 나를 위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로 나를 어렵게 한다. 하나님은 내게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이 구원을 이루신 게 아니다. 착하게 살라는 데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위선 없이 착한 행실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은 나의 어떤 재능을 주께 바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전부를 원하신다. 청년의 선행만 원하시는 게 아니라 청년을 원하시는 거였다. 주를 따른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에게 걸림돌이 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하나님은 기쁨이 된다는 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아니다. 행복은 다분히 유치하고 치졸한데서 얻는다.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일이지, 나의 목적을 충족시키시는 게 아니다. 그리고 나를 또한 그 목적으로 세상에 밀어넣으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17:18).” 말도 안 되게 주님처럼 살라고 하신다.
그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걸 느끼면 느낄수록 나는 주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내가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말이다. 나는 자꾸 내가 가진 무엇을 내어드리려고 하면 주님은 고개를 저으시며 나를 원하신다. 이를 바울은,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나의 무엇이 아니라 나를 들어 주의 영광이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순간 꼭지가 돌아 경우에 없는 짓을 하고 난 뒤 나는 망연자실 주님을 본다.
내가 나를 주체할 수 없어서 말이다. 어쩌면 나는 오늘 본문의 청년처럼 살 때가 더 행복했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나름 의로웠고 그만하면 정직했으며, 한다고 하면서 열심을 다하던 때가 종종 그립기도 하다. 물론 그때가 부끄러우면서도 말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된 게 점점 더 주님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래 맞다. 나는 본성적으로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나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내 의지로 누구를 용서할 수는 없다. 더더구나 누구를 사랑하는 일은 어렵다.
이내 알겠는 것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니까 이런 고민도 한다. 나를 못 견뎌할 줄도 안다. 그래서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늘 그런 나에게 지치는 법 없이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7).” 주의 사랑은 나의 모든 허물을 덮으신다.
유난히 부산하고 바빴던 하루, 막무가내로 아이 편을 들다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일까?’ 하는 막연한 이해도 있었다. 자식 일에는 물불 안 가리는 것이다. 부끄러움이고 경우고 다 필요 없다. 내 눈엔 내 자식만 들어오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더욱 주를 바라며 주의 뜻에 따라 살까? 이는 도덕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앞에 나를 내어놓는 일이었다. 다른 건 소용이 없다. 내 수고와 애씀은 차후 일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나를 선하게 하실 수 있다. 의를 이루게 하실 수 있다. 그러기까지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9).” 다 버리고 주를 따를 수 있는 일은 내가 아니라 주가 그리 이끄시고 여겨주실 때이다. 내가 알기로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영 구제불능이다.
나는 주께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시 102:1).” 주가 내게 두신 가장 확실한 은신처는 기도다. 때로는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7).” 그와 같을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12).” 나로 하여금 주 앞에 세우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1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26-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