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전봉석 2018. 3. 18. 07:30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복음 21:8-9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초라하기 그지없으나 영광되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거침이 없으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말씀에 공감하고 실천하는 일이 사역자의 길이겠다. 언제나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지만,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늘 경계하고 또 돌아보며 주께 바라는 길이었다. 세상의 훼방에도 실족하지 않는 것이 복되다.

 

아이가 새로 왔다. 우려했던 것이 무색하게 사뭇 진지하였다. 말은 역시 하는 이의 것이 아니라 듣는 이의 것이었다. 무엇으로 아이의 상처가 깊어 무기력증으로 고생하는지 궁금하였다. 중3. 당돌하게도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자기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글 쓰는 동기를 말해주었다. 주일을 권하고 기대하였다. 모처럼 느끼는 기대감이기도 하였다. 좀 더 두고 봐야 알 길이겠으나, 토요일 오전. 아이의 출현은 신선하였다.

 

내게 두시는 그와 같은 마음이 싫지 않았다. 공부는 완전 바닥이라 일반 고등학교도 갈 수 있을까 싶은데 그 이상을 기대하고 꿈꾸며 주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였다. 이런 상황 저런 환경 가운데서, 그 어려움으로 하나님은 은혜를 나타내길 원하신다. 환난은 말도 못하게 짓눌리는 상태다. 궁핍은 자유롭지 못하게 갇힌 상태이고 고난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당혹스러운 상태다. 아이를 무기력과 실의에서 건져내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붙이신 것이다. 나는 그리 여겨 아이를 놓고 기도하였다.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님이 내 안에 계신데도 나는 얕은 물가에서도 찰랑거리는 파도보고 두려워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그 또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었다. ‘이런 아이’를 붙이시려고 이런 환경과 저런 사건 속에서 나를 단련하신 게 된다. 주께서 이기신 세상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주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 내가 지고 갈 게 아니다. ‘왜 또 이런 아이인가’ 생각하다가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려고, 내가 바라는 그 주님을 알려주고 싶게 하신다. ‘자기 소개서’를 쓰기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나를 먼저 소개하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말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 토요일 오전. 기특하게도 제시간에 맞춰 글방으로 온 중3, 무기력증에 빠진 아이라는 데 전혀 다른 기대를 갖게 하시는 게 신기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내게 보이시는 아이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주 앞에 나올 아이였다. 조용조용 묻는 아이의 물음에 답하며 그리 생각하였다. 듣고 보니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고 엄마는 성당을 다니고 두 딸은 아무 데도 다니지 않는다.

 

갈라진 신앙만큼 서로의 반목과 상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자들이다. 이는 하나님의 암호다. 그렇지. 나의 낡아짐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호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를 아는 자의 시선이다. 누구 말처럼 조약돌은 닳고 닳을수록 아름답다. 그 시달림이 은총이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게 없다. 아이가 제 발로 걸어서 왔다. 이건 또 뭔가? 싶은 우연 같으나 주가 새로 맡기시는 일이었다. 기다릴게. 나는 주일을 권하고 함께 가자고 한 뒤 말하였다. 내 안에 새겨두는 다짐 같은 거였다. 기다린다는 일. 언제부턴가 내가 짐작하는 나의 가장 큰 일은 막연하여도 무던하여서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의중을 다 알 수 없다. 짐작하면 곧 틀어져 번번이 내 생각은 틀린다. 그럼 이제 배우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하는 일이다.

 

그 안에 나의 자유가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내가 찾은 길이 아니다. 내가 부른 아이가 아니다. 새로 보내신 아이에게서 나는 길을 본다.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그렇지. 내 안에 소원이 있었다. 굳이 교회에 대한 반감이 없는 부모라는 사실 앞에서 안도하였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내 안에 두신 소원이었다. 공부도 못하고 남들보다 어수룩하여 주눅이 들어, 아이는 시무룩한 영혼이었다. 주님은 다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뭘 모르면서도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호산나’를 외쳤다.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 118:25).”

 

주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말씀을 붙들며 생각하기를, 주께서 구원하시기 원하신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3).” 아이를 마주하고 모처럼 처음 대하는 시간인데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향한 나의 마음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아이의 심기증이 서로를 주목하게 하였다.

 

오후께는 자주 속이 울렁거려 금세라도 위경련이 올 것 같아 두려웠다. 저녁으로는 바나나와 양배추를 먹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시 104:33).” 시편의 기도를 다짐하듯 되뇐다. 곧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34).” 내 몸은 비록 마음과 달리 나를 힘들게 한다 해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주로 말미암아 나의 어려운 처지와 환경이 오히려 주를 더욱 사모하게 한다. 우리 눈에 기이하다. 버려진 모퉁이의 머릿돌이 주의 전을 이루심이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시 104:16-17).” 주께서 나의 품을 넓히시리라. 아이를 품어 주께 기도하며 주 앞에 나와 함께 주를 바라며 구할 수 있기를.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30).”

 

그러므로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3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