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복음 23:11-12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시편 106:43
수시로 벽에 부딪힌다. 뭐라 말해줘야 할까? 말을 한들 들으려하지 않는 데는 과연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날이 풀려 산행을 즐기는 자로 저는 ‘산신제’를 다녀왔다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였다. 하긴 모든 모임이 그런 일을 다반사로 행한다. 여전히 반복되는 죄의 굴레인 것이다.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시 106:19-20).” 자기 영광을 기어이 하찮은 데 부어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 <빛나>를 읽었다. 선생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냈다. 손에 잡히지 않아 한참동안 읽지 않다가 후루룩 읽어 내려가면서 착잡함을 느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혹은 저들이 보는 교회와 믿는 자의 모습에 대해, 두루두루 무마하고 모든 데 신이 깃든 형태의 주관을 접하면서 선생의 평소 지론을 듣는 것 같았다. 나름의 문학적 승화는 좋았고 그 짜임이 역시 노벨상을 탄 작가의 저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다만 더는 동조할 수 없는 주관과 그 안에 펼치는 논리가 거북하였다.
의미 없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대하여 환멸을 느낀다. 사랑에 대한 가치나 성(性)에 대한 기준이 무너진 지 오래고 신에 대한 판단이나 죽음 너머의 세계를 무(無)의 개념으로 흩어버리는 데 낭만적이다. 자기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는 오늘 성경의 말씀을 읽으며 생각이 많아진다. 어릴 적에는 그래도 선생의 뒤를 따라 시늉이라도 하더니 아이들이 더는 자기 주관을 버리지 못하는 논리와 같았다.
좋을 대로 하는 것이다. 몸이 원하고 마음이 닿는 대로, 그것을 마치 대단한 자기 가치인 양 신봉하기까지 하면서. 누구는 사랑과 섹스를 동일 선상에 두고, 누구는 모호한 판단을 뒤로 하고, 누구는 자기 기준을 우선으로 삼으면서.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유의 내용으로 젊음을 탕진하고 낭만을 소진하던 때를 생각하였다. 그러고 있는 아이들을 안타까움으로 돌아보았다. 뭐라 해도 들리지 않는, 저마다 귓구멍에 이어폰을 꽂고 나란히 걷는 형국이니.
그러므로 성경의 경계가 크게 들린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우린 그렇게 지조 있지 못한다. 스스로를 믿는 일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아무리 그래도 난 안 그럴 수 있어, 하는 마음이 벌써 나의 영혼을 좀먹는 일이다. 말씀 붙들고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지켜야 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우습지만 나 역시 여전하여서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좇던 달콤함을 그리워하였다. 선생과 붙어 죽고 못 사는 사이처럼 굴던 때를 떠올렸다. 하나님을 흩어서 하느님으로 보편화하고 그래서 모든 것에 깃든 우주의 기운을 두루뭉수리하게 내가 믿는 신이라 하였다. 풀 먹는 소를 행하여서 말이다. 그러니 오늘 날 그 젊은 날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안 믿는 부모와 그 가정에서 자란 저들의 척박한 영혼의 실태를 어쩌면 좋을까? 누가 저들을 돌이켜 주 앞에 올 수 있도록 기도를 쉬지 않을까?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함께 기도하였다. 우리 가정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주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을 같은 아버지로 섬기며 살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 은총인지. 긍휼인지. 그래서 오늘 날 안 믿는 가족들 사이에게 피폐한 영혼으로 멍든 아이들을 우리 곁에 붙이시는 것이구나.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려고. 권하여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2).”
먼저는 저들 앞에서 늘 변함이 없는 모습으로 주를 바라야 한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니고, 그 속내는 안 믿는 이들이 산신제를 드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무엇을 빌고 구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그저 그렇게 모방하는 삶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맺고 사는 것이었으니. 우리의 친절이 또 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받은 자로서 구할 것이었다.
이로써 빛의 자녀답게 사는 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래 맞다. 나는 모처럼 ‘좋은 소설’을 읽으며 전에 내가 속하였던 어둠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게 그처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 나의 영혼을 등한시하고 살았던 때를 말이다. 이제는 안다. 오직,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 나의 삶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질실함이 묻어나야 한다. 보고 알게 해야 한다. 이를 꾸며 의식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10).” 내 안에 두시는 아이에 대한 어떤 마음과 그 때문에 자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일까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11-12).” 나는 이제 부끄러운 걸 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그 도덕이 얼마나 옹색하고 구차하였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13).” 이제는 빛이다. 빛의 자녀로 산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에 대하여 집중하는 일. 기도였고, 그러라고 마음에 자주 두시는 생각이었으며 그것으로 아이를, 상황을 마주하게 하시는 일이었다.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은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러게, 할 수도 없는 저들의 척박한 현실을 두고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사명이었다. 맡기신 일이었다. 당연한 것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저가 아무리 선하고 의롭고 열심이다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그렇지. 그 차이는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계신 것과 안 계신 것의 차이다. 엄연하여서 우린 결코 스스로를 의롭게 할 수 없다. 아,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곧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계시다는 증거는 그의 마음을 내가 품고자 함이었다. 그 마음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다. 품어야 한다.
지켜야 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스스로 삼가야 할 일이고 지켜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조심해야 하고 알려야 한다. 곧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오늘 말씀은 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일깨우신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1-12).” 자기를 낮춤으로 주가 높이시기를. 주의 이름만이 영광을 받게 하는 일. 그럼에도 또 수시로 무너지고 넘어지기 일쑤여서,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시 106:43).”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이를 깨닫고 돌아서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하고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하는 것이어서, 무엇보다 성령이 주도하시는 일임으로 나는 말씀 앞에 고개를 조아린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44-46).” 내게 향하셨던 주의 은혜라. 우리 아이들이 또한 그와 같을 수 있음을 확신하며.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47).” 나는 기도한다.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