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전봉석 2018. 3. 21. 07:31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24:12-13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43

 

 

 

종종 아이의 글을 읽을 때, 지나친 정직함이 때론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가 살아남는 길은 무기력해지거나 소심하여져 더는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길뿐이었다. 공부고 뭐고 다 작파하고 있던 아이가 어느 날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과 그러자면 일반 고등학교에라도 가야 할 것 같다는 조급함이 생겼고, 아이엄마는 미장원에 앉아 이런저런 푸념을 하다 아이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며, 미장원 여자는 자신의 큰 아이 때문에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던 게 기억이 났고, 그래서 아내의 전화번호를 아이엄마에게 주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 너머 숱한 우연과 우연이 서로 겹쳐 연이어지며 나와 상관없는 듯 이루어지다 어느 순간에 비로소 내게 맡기시는 일이 된다. 앞서 이혼을 하면서 언니를 데려왔고, 아이엄마는 다시 작년에 이혼을 한 셈이니. 언니는 혼자 대학생이 되었고 아이는 그런 언니가 누구보다 서먹하였다. 나는 아이의 글을 읽으며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어떤 슬픔이 또 아픔이 밀물처럼 다가왔고, 나는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리려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안 되겠다, 너 주일 날 나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나랑 같이 신앙생활하자. 나의 뚱딴지같은 말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면서도 네, 하고 대답을 하였다. 안 됐다고 해서 내가 잘해준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작년에 공식적으로 엄마는 다시 이혼을 하였고, 그럼에도 같이 한 집에 사는 것은 아이가 심리 상담에서 불안증세가 높게 나와 어쩔 수 없이 고3 될 때까지만 그리하기로 했다는데. 언니는 혼자 소리 죽여 우는 날이 늘었다. 정작 지금 아빠와 살고 싶은데 아빠와는 공식적으로 남남이 된 것이다.

 

이 복잡한 가족 관계를 이해하느라 나는 몇 가지 질문을 해야 했고 아이는 덤덤하니 그에 답해주었다. 자신 때문에 가족 간의 어색한 동거는 이루어지고 있는 거였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오늘 말씀은 이를 지목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2-13).”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앞서 나를 주 앞에 있게 하셨고, 아이와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임을 깨닫게 하신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43).”

 

나는 어찌 주체할 수 없어 아이에게 말했다. 안 되겠다, 예수 믿자. 나는 내가 주를 좋아하는 것과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그것으로 우리의 만남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주고 싶었다. 아이의 너무 정직한 고백이 나를 어지럽게 하였다. 남에게 말하는 게 처음이라니까 그 속이 오죽했을까? 친구가 다섯 있는데 서로 어울려 노는 것뿐이지 속엣 얘길 나눌 정도는 아니라면서. 어쩐지! 아내는 나의 설명을 듣고 아이엄마가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퍼즐조각을 맞추듯 고개를 끄떡거렸다.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이와 아이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우리 속에는 일찍이 하나님께 향한 이끌림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든 또는 한사코 외면하는 마음으로든 그 이끌림은 성령의 주도하심으로 이뤄진다. 나를 따르라, 했을 때 처음에 제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에 이끌려 주를 따랐다. 십자가를 알기 전이었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은 3년 뒤의 일이다. 저들은 왜 자신들이 예수를 따랐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3년 후 나를 따르라, 하실 때의 부르심은 다른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내게 얽힌 온갖 사연과 어쩔 수 없음을 부인하고,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하나님이 다음 이야기를 어찌 훑어가실지 궁금하여졌다. ‘어떤 느낌’이 괜한 게 아니었다. 나는 우물쭈물하지 않고 주를 권하였다. 그 사랑을 알려주었다.

 

여기까지도 내가 한 일이 아니라면 남은 이야기도 내가 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내 이야기가 아이의 이야기와 만났고, 아이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아빠는 교횔 다니고 엄마는 성당에 다니고 두 딸은 아무 데도 다니지 않는다는 말에 의아했는데, 그랬구나!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2-13).” 나는 오늘 아침, 말씀 앞에 가만히 숨을 죽인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2-33).” 누가 누구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우리 이야기를 알고. 저가 소개한 우리 이야기 속으로 누가 들어오면서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것’을 아는 것처럼, 배후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 두 번째 만나 글을 쓰면서 아이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의중을 감추지 못하였다. 주일에 오자. 같이 믿음 생활하자.

 

그렇지 않으면 나는 감당할 수 없음을 직감하였다. 우리 곁에 보내시는 아이들의 면면을 둘러볼 때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는 어찌 주체할 수 없는 사연들을 목격한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런 아이들’의 그런저런 사연 앞에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내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나를 따라오너라, 하실 때는 몰랐다.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성령이 주도하시는 일이다. 모든 이야기는 하나 같이 움직여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문득 미장원에 앉아 딸아이 일로 푸념을 떨던 여자를 생각한다. 이를 듣던 미장원 여자가 아내를 떠올린 것은 거의 동시적이었을 것이다. 장성한 자기 아들애를 글방으로 좀 보냈으면 했는데 기어이 말을 듣지 않던 걸 속상해하며 저가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화를 해볼 마음과 그리 성사되어 일이 여기까지 오는데 어쩌면 찰나적인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 24:34).” 모든 어려움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다. 그의 다스리심이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5).” 그게 언제 일어날는지 알 수 없으나, 그때에 나는 이제 주를 생각할 줄 안다. 주의 이름밖에 부를 수 있는 게 없다.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밖에 없음을 말이다.

 

세상은 우리를 밀 까부르듯 까분다. 그 시달림으로 영혼은 지쳤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 22:31).” 주님이 날 위해 기도하신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 이제는 내가 내 곁에 두시는 아이를 굳게 해야 하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가야한다는 그 까불림의 끝에서 주를 본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24:31).”

 

아,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몸은 부대끼고 마음은 시달리면서도, 그래도 내가 주를 바랄 수 있는 일은 주께서 날 위해 기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이처럼 나를 돌이킨 후에 아이를 곁에 보내신다. 시달림으로 그 까부는 현실의 모진 세파에서 아이의 영혼은 지칠 대로 지쳐 까부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내게 늘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아이와 아이언니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 아이들이 당해온 까불림이 안타까웠다. 아이 글을 읽으며 울컥, 하였고 나는 이를 숨기지 않고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었다. 그 속 모를 저 어디쯤에서 주의 이끄심이 아이의 귀를 열어주실 것을 안다. 아이도 미처 모르고 있었을, 주께서 얼마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시는가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물으신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45).”

 

아이의 글을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듣고 나누면서 나는 더욱 조심스럽게 그러나 거침없이 주를 소개하였다. 그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이는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2-3).” 전날까지만 해도 우린 전혀 별개의 이야기로 각자의 동서남북이었는데!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6-7).” 주께 아뢸 뿐이다.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아니면 내가 달리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 그러므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