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태복음 26:35, 56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시편 109:27
말로야 누군 못할까? 생각으로야 누군들 의롭지 않을까? 예수님은 철저히 말씀을 따라 응하셨다. 그러기까지 세 번씩이나 성부께 아뢰고, 성령은 성자 안에서 괴로워하셨다. 충분히 안 그러실 수 있고, 얼마든지 반전을 꾀하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을 이룰 수 없음으로 참으셨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 26:53-54).”
이를 위해 예수님도 기도하셨다. 한데 우리는 큰소리친다. 호언장담한다. 말로나 생각으로나 못할 것 없다고 여긴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35).” 기어이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 어쩌겠나! 그 또한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인 것을.
의사는 약물에 의한 부작용으로 그것이 위벽을 자극한 것과 강박적으로 그럴 것이란 심리작용이 동시에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약을 새로 바꾸고 일주일을 더 지켜보자고 하였다. 안 그래도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가만있었다. 자전거를 타기에 좋은 날씨였다. 천천히 페달을 굴려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왔다. 내게 두시는 어려움도, 그것을 어찌 관여하여 치료하려는 손길도, 그와 같은 마음도, 불편함도, 모두 주가 이루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예수께 순종하신다. 성자는 성부께 순종하신다. 성부는 말씀을 이루신다. 태초에 말씀이 있으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 아버지의 말씀, 약속을 우리에게도 보내주신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머묾과 떠남은 동시적인 것이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여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라고 한다. 그 여정은 험난하면서도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이에 따라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일이다. 때로는 내가 지금 왜 이 길을 가야 하나, 어렵고 답답한 심정뿐이지만,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자전거 페달을 굴릴 때면 허벅지 근육의 싫지 않은 통증이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심기증 환자인지도 모른다. 내 병을 병으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주를 바라게 하는 데 더욱 의미를 두고 싶었다. 건강을 염려하는 것과 그 불안이 오히려 나를 경거망동하지 않게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를 더 바라게 하는 일도. 그러므로 건강이 꼭 건강한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10:27).”
오후 들면서 위경련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오후께 아이들에게 ‘<소나기> 이어쓰기’를 시켰다. 그 조합이 어쩌다 그리 된 것이지만 중3 아이는 왕따였으나 개의치 않고 발랄했고, 중1 아이는 ‘난폭한 엄마’ 밑에서 늘 종이인형처럼 붙들려 있으며, 초등 6학년 아이 하나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누구 말을 듣기 어려워했고, 두 번째 아이는 감정기복이 심해 혼자 깔깔거리며 웃다가 조금만 뭐라 하면 사내 녀석이 훌쩍거리는 게 일이었다. 이런 네 아이를 이번 주부터 한꺼번에 수업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다. 의외로 조용하고 진지하였다.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이제는 예사로 넘기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그럴만한 애를 보내신다고 생각한다. 또 한 아이가 오게 생겼는데 모두가 싫어하는 아이다. 공부는 지진하고 성격은 외통이어서 그 엄마도 혀를 내두르다 우리에게까지 온 모양이다. 아이들의 세계가 고스란히 이 세대를 빼다 박았다. 닮은꼴이 아니라, 어른들 뺨친다. 그럼에도 기어이 주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던 귀신들린 자나 혈루증 앓는 여인이나 죽어가는 딸을 둔 아비나, 우리들로 주님이 서실 자리에 세우시는 걸 느낀다.
다만 우리는 기도할 뿐이다.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시 109:27).” 우리는 뭐가 나아서가 아니었다. 주가 어찌 이루시는가 보게 하려 하심이다. 먼저는 우리에게 나중은 저들 본인에게,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는 먼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가운데서 주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때로는 그냥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의 큰일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는 동안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져다 예수의 머리에 붓는 일. 누군 왜 시간을 허비하는지, 인생을 방치하는 지 나무랄 테고, 이것으로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겠다며 곧잘 지론을 펴곤 할 테지만.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10).” 이게 어찌 좋은 일인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1).” 실제 그리 안 하는 자의 반박이 거센 법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3).” 기억함은 더불어 주께 영광을 올릴 수 있다는 영광된 일이다. 그때에 누군 나가서 예수를 판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한 이야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4).”
성자는 성부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은 성자의 순종에 능력이 되신다.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한데 누구는 안 그럴 수도 있었음에도 그리 행하여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인생으로 끝을 맺는다. 말씀 앞에 앉아 있다 보면 동시에 두 이야기는 나 하나를 두고 이르시는 것 같다.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이를 거역하듯 제 갈 길로 갈 수도 있다. 이는 내 의지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그 결과가 똑같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이로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그렇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1:4, 9).” 택하심과 예정하심의 은총이 없이는 오늘 우리의 만남도 없다. 우리가 가정예배를 드리며 함께 기도할 때 이젠 이와 같이 붙든다. 그렇지 않고는 이 일이 그냥 이상하기만 해서 말이다.
일부러 ‘그런 애들’만 골라서 받는 것도 아닌데, ‘어쩜 이럴까?’ 싶을 정도이다. 아니면 모두가 그런데 아무도 아닌 척 하는 가운데서 우리만 그런 사실에 주목하게 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일이 열거하기 민망할 정도로 아이들의 영혼은 척박하다. 폭압적인 아이엄마는 다반사고 온전한 가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망가진 부모들 사이에서 고통당하는 아이들이 힘들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말썽을 부리는 것도 아이들로서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자폐나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에 버금가는 이상한 말썽이 아이들도 괴롭다. 한 예로 중3 여자아이는 공부도 못하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옷차림이나 행동거지가 너무 함부로 굴어 걱정이었다. 그러던 게 여전히 왕따이면서 개의치 않게 되었고, 공부는 상위권에 올랐으며. 여전히 옷차림은 거지꼴이지만 더는 시무룩하거나 외따로이 굴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아이엄마는 치장이 너무 과하고 그 아빠는 소심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문제는 그 너머에 원인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상황이 주의 일이라. 우리는 더 이상 장담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이는 내가 나를 자신할 때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나는 이제 나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 더는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할 일들인 것이다. 우리는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41).” 할 수 있다, 없다가 아니다.
기어이 나는 통곡하였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75).” 하면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시 109:21).” 내 의가 아니라 주의 의로 산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26).” 이것을 알려주는 게, 이제 우리의 일이다.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