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마가복음 1:7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시편 112:4
그저 다만 나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다.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머문다. 이는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것이다. 아이에게 어쩌면 좋을까? 싶고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데도, 나는 무던히 외치는 자의 소리로 흩어져야 하고 주의 길을 준비하여, 언제고 저 아이에게 오실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로써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가정부와 함께 살고,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만나고, 아빠는 누군지 모른다. 나는 아이의 말에 머리가 띵했다. 정말이지 이게 사실인가? 싶었으나 되물을 수 없었다. 한껏 멋을 부리고 돈을 잘 쓰며 공부도 적당히 잘 하는 편이어서 모든 아이들이 저 애를 부러워할 정도였으나, 아이의 밝은 면 뒤에 그런 끔찍한(!) 현실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도대체가 제대로 된 가정을 보기가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 싶을 정도로 마음만 헛헛하였다. 그러니 나는 다만 주가 계심을 알리고,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마음이 어려웠으나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올 것으로 여겼던 아이는 아무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그러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뚱딴지 같이 예배 중에 한 아이의 문자는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늘 오려고 하는 마음은 있었으니까, 요즘 바빠서 그렇다느니 다음 주에는 가도록 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주었겠지? 내 마음이 어디로 쏠리고 어떤 일에 기뻐하고 기대하는가를 보면 그야말로 신비롭다.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다 알겠다는 듯 굳건한 것이다.
그와 같은 힘듦을 즐거워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역설적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무슨 일 때문인지 아침 일찍 위경련이 일어 힘들게 하더니, 생각이 많아 저 혼자 어지러울 지경이었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를 즐거워하라니!
내가 아이를 생각함은 주께 향하는 나의 마음을 더한다. 들여다보면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나? 어린아이인데 어른들의 세계가 너무 복잡하다. 정말 그게 사실인가, 싶게 아이의 뒤틀린 삶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말이지 그런 아이들만 보내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데, 성경은 이르시길 염려하지 말라는 것.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러니 이 모든 상황을 통해 성령이 임하시는 길이 될 것이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내가 하는 일은 아이를 사랑함에 앞서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주를 사랑함으로 아이에 대한 마음을 거두지 않는 일이다.
곧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 그러므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 내가 주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가 이로써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없음을 느낄수록 주께 바라고 의지하는 수밖에.
이는 마치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이었구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그러니까 ‘저런 아이들’을 자꾸 붙이시는 까닭은 내가 더욱 주의 가지로 붙어 그 열매를 맺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오후 내내 생각이 많았다.
무슨 드라마에서나 보았을 법한 가정사를 겪고 있는 아이였던 것이다. 미혼모일까? 아니면 다른 가정이 있나? 왜 아이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나 아이를 만날까? 아빠는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죽었다는 것인지 이혼했다는 것인지? 여덟 살 때까지 키워주던 가정부할머니가 죽고 이후 새로 들어온 할머니와 같이 산다고 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돌아가고 그 상황을 미뤄 짐작하느라 말이 분분했다. 아내는 연신, 어쩐지! 어쩐지! 하며 이제야 알겠다는 듯 말이 길어졌다. 주일마다 오겠다니 그것도 신기하였다.
주와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나는 일이다. 출세하고 성공하여 반듯한 위인들을 만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맨 귀신들린 자에, 병든 자에, 세리에, 창녀에, 정말 이런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었구나? 싶은 부류의 아이들이었다. 그나마 부모가 아예 가지마! 하고 교회 가는 것을 막으면 더는 어찌 손쓸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러니 어쩐다? 한참 마음이 어렵다가도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우리를 도우실 그리스도이신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우리가 이제 주의 이름으로 이와 같은 자리에도 머물 수 있는 것이어서 아내는 새삼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였다. 그동안은 오해도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염색하고 날라리 같이 하고 다녀 애가 좀 그런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그저 막연하여서 속수무책이라, 우리의 연약함을 주가 동정하지 않으시면 감당이 안 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그래서 더 주의할 것은 감상적인 마음이겠다. 내가 어찌 잘해야지, 하는. 우리가 잘해주어야지 싶은 막연한 동정이 엉뚱한 곳을 바라보게 할 수 있다. 딸애와 둘이 앉아 한참을 설왕설래하던 아내가 나를 돌아보며 어쩌면 좋겠냐는 듯 되물었다. 난들 아나? 맡기신 아이들 외에 전혀 예상도 못했던 친구아이라, 좀 더 지켜보고 하나님이 어찌 이루어 가시는가, 두고 보자고 할밖에. 결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만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그렇지! 예수의 생명이 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의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 같이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는 성경의 일깨우심은 귀하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1).”
그러니 주 앞에서 정직할밖에. 나의 이런저런 사정도 힘에 부치는데 그럼에도 이와 같은 아이를 곁에 두시는 까닭은, 주의 길을 굳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시 112:4).” 우리가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하나, 싶으나 실은 주께서 감당하실 것을 안다.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주만 바란다는 것. 우리들로 하여금 주가 아니시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알게 하시려고, 은혜를 구할 따름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되뇐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5).” 받았으니 주게 하신다. 그럼 잘 되게 돼 있다. 그 일을 정의로 행함이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6).”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흔들림 없이 영원할 수 있게 하시는 일이었구나. 이런저런 주변 이야기에 마음 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곁에 보내신 아이를 두고 주께 의뢰함이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7).”
우리를 흔들고 약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주가 보응하실 것이다.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8).” 다만 주님을 따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기도할 따름이다. 주와 함께 가는 길이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8-30).”
그와 같은 권세를 주셨으니,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주의 나라에 있어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신다. 아버지의 나라를 맡기심이다. 주의 모든 시험 중에 함께 한 자들로서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아내의 눈빛에 나는 막연하여서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가라 하신 길이다. 주가 약속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5).”
다 주를 버리고 떠나가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묵묵히 또 이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하시기를.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