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마가복음 3:28-30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7-8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내가 어찌 다가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는 말하길, 예배는… 종교에 대해서는…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네게 믿음을 줄 수도 없고 종교를 하나 갖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렇다. 기어이 강권하여서라도 전하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게 있다. 그런 것에 대하여, 말로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와 보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때, 하나님은 부당하다. 망대에 치어 열여덟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때, 이를 보고 하나님에 대해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 13:4).” 우리가 모두 죄인인 것을, 회개가 없이는 이와 같이 망할 수밖에 없음을,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 어떻게 아이에게 설명하면 좋을까?
말하기를 멈추고 나는 주께 아뢰었다. 기도는 이럴 때 해야 하는 것이겠거니. 성령이 움직이셔야 한다. 아니면 고작 나는 너를 동정하는 정도에서 안 됐다, 하는 마음으로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부여서 그것도 사뭇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혼잣말처럼 나는 아이에게 말하듯 웅얼거렸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었다.’ 아파야 하는데 아프단 걸 느끼지 못하는 통각마비의 시대다. 이를 성경은 화인 맞은 양심이라 한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저들은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1).” 미혹이 많은 시대다. 귀신의 시대다. 산을 좋아하면 그냥 산을 오르면 될 일인데 사람들은 산의 신을 위해 제를 드린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의 신에게 제를 치르고,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길의 신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온갖 잡신이 난무하다. 저마다 뭘 하든 고사를 치러 액운을 떨치려 든다.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의 모습이다.
아이에게 이를 어찌 말해주면 좋을까? 중3. 한참 고민이 많을 때에 다섯 살 많은 언니는 입을 꾹 다문 지 오래다. 엄마는 드세고 아빠는 우유부단하다. 아빠는 오지랖이 넘치고 엄마는 고집이 많다. 그럼 너는 뭐하니? 나의 질문은 바보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는 뭘 할 수 있겠나!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큰일을 치르고 있는 아이였다. 진로 문제로 담임선생과 상담을 하였다. 학교에서는 나머지 공부를 시켰다. 아이는 불쾌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본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고통이 뇌로 전달되어 위험을 알리고 영혼에까지 이르러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일에까지 관여해야 하는데, 별로 고통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나는 아이의 덤덤함이 무서웠다. 설마 모든 게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 테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C. S. 루이스의 표현대로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경고음을 낸다. 위험을 알려주는 일이다. 그런데 아이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고, 내가 손을 내미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보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은 그 실태가 더 심각하다. 골반을 흔들며 원색적인 춤을 따라한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랩을 흥얼거린다. 아이돌 가수를 신처럼 여긴다. 조금만 뭐라 하면 선생이고 어른이고 다 덤빌 기세다. 거침이 없다. 돈을 물 쓰듯 쓴다. 저들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수만 원을 날린다. 재미로 그런다. 그걸 뭐라 하면 그야말로 으르렁거린다. 모든 사고가 정지된 것 같다. 마비다. 감각이 없다. 통각을 잃었다. 아플 게 없다. 왜 아프냐고 반문이다. 뭐라 설명하려 들면 귀를 틀어막는다. 몸을 흔들며 사타구니를 훑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할까? 아이에게 하나님을 알려주려 하면, 미쳤다고 한다. 저가 미쳤다, 하며 손가락질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마 3:28-30).” 말씀 앞에서 안타까움으로 아이들을 생각한다. 안 믿는 저들 부모를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때론 참 지치는 일이다. 외면하고 말면 그만일 텐데, 그럴 수도 없게 하나님은 또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 지어 묶어두신다. 고통이 있어서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용기도 얻는다. 내가 저 아이로 고통을 호소한다는 게 나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안 오면 그만이고 안 보면 다일 텐데, 그게 이상한 것이다. 믿음의 성숙함이란 고통의 긍정적인 면을 의식하는 일이다. 내 안에 어떤 고통이 없다면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나 할까? 척척, 내 뜻대로 되면 굳이 내가 하지 하나님께 아뢸 게 뭐 있겠나!
이리 달래고 저리 손을 내밀어도 소용이 없으니,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우리가 왜 이 아이 때문이 마음이 아파야 하나? 이 고통이 은혜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 기도한다. 저와 저의 가정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미 서류상 이혼을 끝낸 부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 집에 같이 산다는 일이 기괴하다. 스물두 살 언니가 할 말을 잃은 것도 이해가 된다. 아이는 언니와 말하고 싶다. 아빠가 다를 뿐이지 엄마는 같지 않나. 억울한 마음도 든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주를 신뢰한다는 일은 은혜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리 하게 하시는 은총 말이다. 나도 내 안에 왜 저 아이로 꽉 차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린 계집아이들이 현란한 춤을 춰대며 그 동작이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하는지, 표정까지 지어가며 낄낄거릴 때 나는 소름이 돋는다. 말 해봐야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다. ‘방탄소년단’이 우상이다. 저들의 동작 하나 노래 한 가닥이 진리다. 수학여행에서 장기자랑을 한다면서 춤 연습이 한창인데, 어쩌면 좋을까?
그냥 한 때 다 그렇고 마는 일일까? 산신제를 드리고 왔다며, 칠순이 다 된 노인은 자신의 건강함을 자부하며, 그냥 그것도 문화라고 치부하고 만다. 꼭 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음식들 차려놓고 술 한 잔 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게 의미 있지 않으냐면서 되레 나의 동조를 구한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면서. 애들 다 그렇지 뭐, 하듯이. 가정사 다들 도진개진 아니겠냐면서.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이라, 행복하면 그만이다 생각한다.
우리네 행복보다 유치하고 가벼운 게 또 있을까? 누군 다 신지도 못할 신발을 사 모으며 행복해 하고, 누군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간직하며 행복해 한다. 행복이 쾌락에 있다고 여기는 한, 마음껏 즐기는 게 행복인 줄 안다. 근사한 삶을 꿈꾸고 누구처럼 호화로운 집을 또는 멋들어진 노년의 낭만을 꿈꾸면서, 맛 집을 찾아 먹는 일에 환호하고, 섹스에 탐닉하고,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언제 다 살았는지도 모르는 게, 현대판 문둥병이 아닐까?
손가락이 꺾이고 발이 문드러지는 데도 아픔을 모른다. 나는 저들 가운데 두 손이 혹은 두 발이 멀쩡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통각을 잃은 시대다. 그래서 우리를 아이들 곁에 두셨는가! 둘러앉아 기도할 때면 아이들에 대한 게 대부분이다. 우리 가정에 허락하신 교회다. 우리가 저들에게 신호를 보내야 한다. 안 들리고 안 보이는 아이들이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병이 들었는데 아픈 걸 모르는 것이다. 당최 아프다는 사람이 없다. 아이의 멀뚱한 표정이 나는 무서웠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무렇지가 않다.
어제그제 자꾸 나환자촌에서 살았던 기억이 중첩됐다. 오늘 이 아이들과 뭐가 다른가? 그 부모의 안달이 또 참견이 혹은 무심함이, 그게 뭔지도 모르고 야단을 떠는 것이다. 내 안에 이는 마음이 주님의 것인가?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문득 생각하기를 에덴에서도 고통은 있었겠다. 죽음도 있었겠다. 플랑크톤이 죽지 않으면 흙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초식동물들이라 해도 풀을 죽여야 먹이로 삼았을 테고.
본래의 고통과 죽음은 오늘처럼 왜곡되기 전이었다. 죄로 인해 뒤틀린 것이다. 죄가 없었다 해도 아담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육신의 죽음이 있었지 않겠나? 아이가 돌아가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기어이 아파야 한다. 고통이 더해져야 한다. 고난을 마다할 게 아니다. 내가 저들의 행복을 비는 기도만 할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잘 되길 바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아프길, 아파서 그 아픔으로 아픔을 감당할 수 없어 잃어버린 통각을 되찾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생명의 힘은 고통과 함께 자라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그러니 내가 어찌 아이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까? 다만 구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함을 깨닫게 하시기를. 그러느라 고통이 유용하였다. 아픈 것이 사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 진리를 예수께서 몸소 행하신 게 아닌가. 고통을 당함으로써 의를 전하였고, 죽으심으로 사랑을 이루신 게 아니겠나. 주 앞에서 떨 줄 아는 게 축복이었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7-8).” 나의 아픔과 고통을 감사할 수 있는 게 성숙한 믿음이었다. 주께서 하실 것이다.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주께서 그리하심 같이, 우리도 그리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