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복을 받는 자로다

전봉석 2018. 3. 29. 07:32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마가복음 4:14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시편 115:15

 

 

 

다른 것을 뿌려봐야 소용이 없다. 허무할 뿐이다. 마음을 뿌리고, 기대를 뿌리고, 사랑이나 희망을 뿌렸더니 영락없이 돌아오는 것은 실망이다. 사람이 다 그렇지 뭐, 사람 참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끝까지 위선을 떤다. 유치하고 한심하다. 졸렬하고 비겁하다. 나는 요즘, 어쩌면 이쪽에 있는 이들이 ‘미투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것을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그동안 나름들 옳다고 여기며 따르던 무리가 많았다. 설마, 했던 것이다.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은 그 바닥이 이내 모래 위였다는 것이다. 허탈감을 넘어 환멸이 몰려든다.

 

특히 이와 같은 고통이나 죄책감은 가치중립적이다. 그래서 두려움을 더한다. 두려움은 보호본능으로 우리의 일탈을 막는다. 어린아이에게 두려움이 생길 때까지 그 부모는 아이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물불 가리지 못할 때이다. 그러다 내가 가진 최고의 권리, 나에 대한 확신을 주님 앞에 내어놓는 자리가 위기의 때이다. 나를 주께 드린다는 것은 나에 대한 권리를 주께 돌려드리는 일이다. 그 잘난 자유의지를 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렇듯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곁에 두시는 아이들이 크게 다가온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오늘 말씀은 이를 밝히신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막 4:14).” 다만 그런 것이다. 내 의지나 내 감정, 나의 기대나 혹여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말씀을 뿌리는 자로서 나는 오늘에 세우심을 받았다.

 

동시에 이 말씀은 내게도 뿌려진다. 이 네 마음은 하나다. 그리 읽힌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15).” 길이 된 마음이란 숱한 이들이 들락거리고 오가고 나다니는 마음이다. 경계가 없다. 굳어져 그 틈이 여의치 않다. 이를 개간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여태 딛고 걷던 데를 지우는 일이다. 들어 엎어 일구고 고르는 일이다. 처음엔 대부분 길이 난 마음으로 다가온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6-17).” 들어내니 돌들이 깔렸다.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말씀은 잠깐 위로가 되고 평안을 주는 것 같더니, 말씀대로 살려는 데 드는 여러 갈등으로 바로 시든다. 갈등이 생긴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좋은 증상이다. 내 안의 영과 육이 싸우는 일이다. 여태껏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새삼 문제가 되는 일이다. 그로 인해 성가시고 귀찮은 게 많아졌다. 돌에 부딪친 것이다. 파내야 한다. 들어내어 파내는 수밖에 없다.

 

다음은 가실떨기에 뿌려진 것인데, 사는 일이 참 고달프기만 하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18-19).” 남들처럼 살아야겠는데 말씀이 주어지니 그게 더 괴로울 따름이다. 말씀이 없을 땐 그저 상관없이 다들 그러려니 하던 염려와 유혹과 욕심이 영락없이 영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다. 거둬내야 한다. 잘라야 한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20).” 비로소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인데 처음부터 옥토인 마음이 있을까? 문득 이 네 가지 마음이 하나로 여겨지면서 길에서 돌밭으로 그 위를 가로막는 가시떨기를 거둬내는 일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인지 모른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성경은 그 가치를 분명히 하신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잠 12:11).” 그래서 예수님의 주장은 우리들로 하여금 가만있을 수 없게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일이다.

 

한꺼번에 여섯 명의 아이들이 제각각이어서 혼쭐이 났다. 과학 독서 독후감을 쓰게 하려는데 읽은 책이 없었다. 가지고 있던 과학 잡지와 검색을 통해 미래과학에 대해, 대체에너지와 녹색 성장을 위한 주제를 가닥으로 잡아 스크랩을 하게 하였다. 중구난방 아이들은 전혀 관심에도 없다. 불쑥 욕을 해대고, 누가 관심 있는 아이돌 그룹을 검색하면 덩달아서 그쪽으로 몰린다. 한 아이는 외톨이다. 다들 여자아이인데 혼자 남자인 것도 그렇지만, 남자아이들은 또 이 유약한 아이를 상대하지 않는다. 짜증이 일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다.

 

아이를 따로 앞에 앉히고 슬그머니 사탕을 하나 주었다. 녀석이 돈을 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쪼르르 몰려 위하다가도 줄 게 없으면 내동댕이치는 것이어서, 늘 아이가 안쓰럽다. 어떻게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될까? 나는 내가 지나온 날과 중첩되어 아이가 안 됐다. 다들 돌아가고 혼자 남아서 좀 더 있다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오늘은 집에 오지 않는단다. 그래서 친구네서 자야 한다나, 아이의 한숨이 깊었다. 무슨 영문인지 멋대로 물을 수는 없었다.

 

주님은 내게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엡 4:11).” 이를 통틀어서 나는 말씀을 뿌리는 자로 여긴다. 그 역할의 정의는 저 아이로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주님과 친밀해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원하기만 하면 당장 임하실 것이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여 말을 듣게 할 수 있을까?

 

여지없이 공중에 있던 사탄이 날름 집어 삼킨다. 뿌려진 말씀을 말이다. 여전히 아이는 길로 남았다. 말씀 말고 다른 데 마음이 쏠려 들고나는 것들을 주체할 수 없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일 저 일, 어린 게 마음만 부산하다. 남아서 좀 더 있다 가면 아이들 없을 때 이런저런 말을 좀 했으면 했는데, 아이들이 돌아갈 시간이 되자 덩달아서 가방을 챙겨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아이 옷을 여며주며 뭐라 할 말을 다하지 못했다. 누나 친구가 시집을 갔는데 가자마자 남자랑 헤어졌다나? 아이 속에는 할 말이 많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휑한 마음에 나는 청소를 하였다. 컵을 씻고 아이들이 펼쳐놓은 책들을 정돈하고 지우개가루를 치우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휘청거렸다.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어야 하는지를 새삼 일깨우는 시간이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하신다. 아이들도 아니다. 공연한 기대가 더 아프다. 한 계집아이는 너무 야하게 옷을 입어서 뭐라 하기도 민망하다. 저들끼리도 눈치를 주고 옷을 덮어주는데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 애는 상대적으로 밀린다. 자꾸 애를 따라하려고 말투며 물건이며 흉내를 내는데, 것도 뭐라 할 수 없다.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는 섣불리 내가 다가갈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럼 나는 무얼 해야 할까? 길가 밭이니 그냥 그러든가 말든가 씨를 뿌리면 될 일인가? 가시떨기에 막혀 염려하다 온갖 유혹에 시드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나? 아이 마음의 저 큰 돌을 내가 어찌 파낼 수 있을까? 저절로 옥토가 되는 경우는 없다. 내 안에 이런 조바심과 안타까움을 두시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늘 나는 모욕감을 느끼고 환멸을 당한다. 화가 나고 짜증이 인다. 되바라진 아이는 정나미가 떨어진다.

 

치밀어오는 화를 누를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돼도 않는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그것이 내게 두신 은사라. 바른 지식을 붙잡는 수밖에 없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그러니 이 일은 내 일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먼저는 내가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해야 한다. 거룩이란 주를 바람으로 나를 부인하는 일이다. 그렇게 내 안에 소망을 두신 이가 일하시게 해야 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주가 이루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항상 대답할 말을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 한다. 두려움은 신앙의 가늠좌가 되고 온유는 선한 양심에 힘을 더한다.

 

내 안에 이는 갈등은 여전하여서 내 영혼의 가시떨기 같다. 염려와 근심이 사그라들지를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감내하고 순종해야 할밖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내가 원하는 것은 늘 뻔하다. 인정받고 싶은 것이고 어떤 성취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만족을 갈구하는 일이다. 아이들을 대하면서도 늘 나는 이와 같은 감정에 시달린다.

 

내 안에 막힌 담이고 여전히 짓누르는 돌이다. 열등의식이며 괜한 자존심이다. 싸움은 정작 내 안에서 치열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영적인 삶이란 참 더디고 느리다. 티도 안 난다. 그럼에도 나에게 또 다시 말씀을 붙들고 말씀으로 씨름하게 하시니, 이게 복이었다.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시 115:15).” 그러므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