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전봉석 2018. 4. 6. 07:2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29-31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121:2-3

 

 

 

기준이 모호해졌다. 아이는 더 이상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부권 상실의 시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도 어색하게 만들었다. 아이보다 아이 같은 아버지들은 삼삼오오 길거리에 둘러서서 낄낄거리며 담배를 피운다. 오락기 앞에서 인형 뽑기를 하느라 열을 올리고, 술에 취해 아이 앞에서 공치사를 늘어놓는다. 아이들은 가소로울 따름이다. 다 안다는 듯 속 이야기를 할 때면 아찔하다. 아직 철이 없어 그런 소릴 하는 것인가.

 

유난히 아버지 이야기를 생략하는 아이가 있다. 다른 아이가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수업 끝나고 같이 과자를 먹을 때 나는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며 기도를 하다 문득 아이 생각을 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훼방하지는 않을까, 하고서 말이다. 아이엄마는 무조건 안 돼! 하는 식이라 더는 주일에 교회를 오라 하지도 못한다. 너무하다 싶게 아이를 잡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겠다. 뭘까?

 

가정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아이들 이야기로 우리의 기도는 가닥을 잡는다. 한 아이는 어제 생리가 터졌다. 축하한다며 아내가 카톡을 해주었다. 결국 사내 녀석들 넷을 묶어서 글방으로 오게 하였다. 그저 책이라도 읽게 해달라는 엄마들의 성화 때문이기도 하였다. 글방을 교회로 이루신 이가 우리는 아이들의 마음을 돌보지만 저의 영혼을 붙드실 것이다.

 

하나님이 기준이 될 수 없으면서부터 세상은 급속도로 무질서해지고 사람들의 가치는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해외 어디 모 교단에서는 반려견도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논쟁에 휩싸였다. 버젓이 목회자가 커밍아웃을 하고 동성애를 지지한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첫 계산이 틀리면 그 위에 무얼 더해도 오류의 폭만 더 키울 뿐이다.’ 진화심리학이 호응을 얻으면서 위가 아닌 아래서부터, 창조가 아닌 자연에게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는 식이다. 그야말로 동물만도 못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 속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말씀을 붙들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물론 다르다는 게 틀리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틀리다는 건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도 이를 엄히 이르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39-40).”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 속에 소금을 둬야 한다. 스스로의 부패는 물론 그 맛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그 기준이 엄연하여 타협할 수 없는 것인데, 이를 오늘 말씀은 첫째 되는 것으로 명시화한다.

 

“첫째는 이것이니,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 단연 우선이다. 그 다음이 둘째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와 같은 우선순위가 어그러질 때 동물도 세례를 받네 마네, 창조의 질서는 흐트러지게 되는 것이다. 가정에 질서는 사라졌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경과 존중은 막연한 구호가 되었다.

 

선생은 그저 사장이나 부장 따위의 호칭으로 전락하였고, 아이에게는 더 이상 어른이 없다. 누가 중심을 잡아줄 것 같지 않다. 원하지도 않는다. 가소로울 따름이다. 어느 저자의 말처럼 18세기 이후 줄곧 종교적인 신앙이 아닌 이성이 윤리의 근간이 되면서, 사람들은 서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쉬쉬하며 답습한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러니 동등하다. 그런 기준이면 오늘에서야 터져 나오는 ‘미투 운동’이야말로 가소로울 따름이다. 누가 누굴 고소하는가.

 

사람의 존엄은 하나님의 존엄에서 나온다. 하나님 상실의 시대에 사람의 창조질서는 희귀할 뿐이다. 미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총기 규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단지 막강한 총기산업의 로비나 압력 때문이 아니다. 그 나라의 기틀은 개인의 권리를 초월적 근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을 중뿔난 존재로 높이는 것이다. 인권이란 개념은 그런 사람들의 자기 합리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다. 종교보다 우위에 둔다. 하나님께 향한 신앙은 이제 단지 개인의 성향으로 치부될 따름이다.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며 그 위에 인권이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그래서 어렵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뭐라고 말로 해서 설명이 가능한 게 아니다. 신비적으로 홀연히 알게 되는 진리도 아니다. 서로의 관계에서 아이들이 내게 느끼는 호감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남들과 다른, 나는 저 아이들과 화목하되 내 안에 소금을 두고서다.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을 둬야 한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온통 자기주장으로 질식할 것 같은 세상이다. 지식적인 전달이 아닌 그 외의 이야기에 아이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스스로도 다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실제 모든 인권운동의 기틀은 기독교였다. 학교 교육도 병원도 노예제 폐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전히 하나님 없는 사회에는 근친상간이 관습처럼 내려오고 여자는 비인격체로 취급된다.

 

모 백일장에 나갈 아이들에게 산문쓰기에 대해 몇 번 특강을 해주기로 했다. 하려고만 하면 어떻게든 서로 시간을 내서 그리 하자고 다독였다. 같잖은 것이 상급 타령부터 한다. 한참 그 취지를 설명하다 김이 샌다. 이 뚱딴지같은 소리에 뭐라 호응해야 할까? 정작 귀를 기울이는 덴 돈이다. 노력도 없이 결과부터 셈하고 있는 것이다. 초딩 6학년이라 그렇다 쳐도 중3 아이가 그리 계산을 하고 있어 입맛이 쓰다. 그럼에도 나는 격려하고 위로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화목하기도 어려운데 스스로 내 안에 소금을 두고 있어야 하는 일이라니! 며칠째 설교원고 초안을 만지작거리며 나 혼자 생각이 많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과연 내가 이 애들 데리고 잘하고 있는 것일까? 잘한다, 잘한다 해야 자라는 게 맞기는 한 것일까?

 

도무지 나는 미쁨이 없다. 내가 나를 어찌 믿겠나? 저 아이들을 무슨 수로 인도할까?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여러 번 되뇌어 내 안에 맛을 낸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주가 맡기셨으니 오늘 내게 이 아이들을 두셨을 테고, 나는 할 수 없다는 걸 빤히 아시면서도 이런저런 상황을 허락하시는 일이니 어쩌겠나! 하나님이 주관하실 것이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하신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9).”

 

어찌 나를 돌이켜 오늘에 세우셨나? 나 같은 죄인도 그리하셨다면 이 아이들이야! 내 안에 이는 어떤 회의와 갈등을 말씀 앞에 던진다. 어느 아이는 왜 엄마를 한달에 정해진 날 한 번만 만날까? 아빠는 있나 없나? 얜 또 왜 아빠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숙일까? 아이엄마는 거침이 없이 다 큰 딸아이를 때린다. 지독하게 폭력적이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책을 권해주는 일도 조심스럽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고는 아버지에 대한 아이의 선입견이 행여 주를 멀리하지 않을까? 나 혼자 노심초사다.

 

그래 우연은 없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주께 의탁하는 수밖에.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4:19).” 안 되면 안 되는 정도로 하면 된다. 어려우면 어려운 만큼만 하면 될 것이고, 절대 나는 아이의 보모가 될 수 없고 그의 선택을 책임져줄 수 없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참견은 교만이다. 엄청난 죄다. 아이를 경직시킨다. 맷돌을 매는 일이다.

 

내가 어디서 도움을 구할까?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 121:2-3).” 아멘.